지난 2017년 납치당한 뒤 도살당한 반려견 '오선이'의 생전 모습. 오선이 사건은 지난 23일, 가해자 중 한 사람이 KBS '동물은 훌륭하다'에 출연하며 재조명됐다. 오선이 보호자 SNS 캡처
방송 화면을 보는 순간 손가락이 마비되는 걸 느꼈어요. ‘방송을 주말 동안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된다’는 사실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참을 수 없었어요. 그 방송을 본 열 명 중 한 명이라도 저 영상에 소개된 인물들이 개과천선했다는 인식을 주면 안 될 일이었으니까요.
오선이 보호자 A씨, 동그람이와의 통화에서
지난달 27일, 수화기 너머 A씨의 목소리는 떨리는 듯했다. 나흘이나 지난 뒤였지만, 아직도 당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가 이렇게 충격에 빠진 이유는 지난달 23일 KBS의 예능프로그램 ‘동물은 훌륭하다’ 2회 방영분에서 7년 전 그와 그의 반려견 ‘오선이’가 겪은 사건이 적나라하게 전파를 탄 까닭이었다.
방송에는 과거 개 시장이었던 구포시장에서 현재 반려견 목욕탕을 운영하고 있는 B씨의 사연이 전해졌다. 그런데, B씨가 7년 전인 2017년 오선이를 도살해 개소주로 만든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논란이 됐다.
사건 당시, 오선이는 목줄이 풀려 A씨의 집 밖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목격한 행인 김모씨는 오선이를 납치해 B씨가 운영하던 탕제원에 넘겨 개소주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B씨는 김씨의 말대로 오선이를 도살한 뒤 개소주로 만들었다. 오선이를 납치한 김씨는 점유이탈물횡령죄 및 동물보호법 위반 혐의로 법정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B씨는 방송을 통해 당시 사건을 언급하며 ‘오선이가 반려인이 있는 개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취지로 말했다. 오선이를 실제로 도살한 그는 수사기관에서도 같은 취지로 주장해 경찰 조사 단계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B씨는 방송에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영업장을 운영한다’며 유기동물을 입양한 사람에게 무료로 목욕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속죄’가 실제 피해자에게 닿은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이는 이번 방송이 ‘가해자 미화’ 논란에 휩싸인 이유이기도 하다. A씨는 방송 직후 KBS에 정식으로 항의했다. 그는 “사건 당사자인 내게 아무 말도 없이 오선이가 납치당하는 영상을 고스란히 방송에 노출했다”며 “심지어 B씨는 사건 이후 7년간 내게 단 한마디의 사과의 말도 하지 않았고, 방송 이후 항의해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며 방송으로 2차 피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방송 이후 A씨의 입장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알려지자 누리꾼들의 비난도 빗발쳤다. KBS는 방송 직후 A씨의 항의와 다른 누리꾼들의 비난 의견에 방송 다시보기를 중단하고 시청자 게시판을 비공개로 전환했다. B씨는 논란이 이어지는 것에 대해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하며 “(그 당시) 피해자에게도 미안하다고 사과했다”고 동그람이에 주장했다. 그는 “(무혐의를 받은 만큼)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동물단체들에게 전화가 온다”며 “심장이 떨려서 심리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논란을 일으킨 KBS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제작진이 계속 침묵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KBS에 오선이가 납치당하는 CCTV 영상을 제공한 동물보호단체 ‘동물자유연대’가 방송 내용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서다. 동물자유연대 정진아 사회변화팀장은 “제작 과정에서 피해자를 무시하고 가해자의 서사만 일방적으로 전하는 건 명백한 방송의 2차 가해”라며 “KBS의 사과와 정정방송을 엄중하게 요구하고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밝혔다.
정진욱 동그람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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