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우크라이나측에 무기를 팔지 않겠다는 이유 (러시아와의 관계등)를 두고, 친 우크라이나 계열 커뮤니티나 SNS에서 `6.25당시 한국은 전세계로부터 도움을 받았는데, 왜 외 면하냐`라고 주장중임.
하지만.엄밀히 따지자면, 6.25 전쟁 당시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일부였고, 굳이 따지자면 북한을 도와준 쪽임. 그러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점령당했던 거니까 그건 논외다, 그렇게 치자면 2차대전중 조선도 일본의 일부였는데 그거는?` 이란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음.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맥락은 한국과 전혀 다르고, 오히려 소련과 우크라이나는 밀접한 관계 였음. 게다가 한국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욕일 정도로 다른 문제임.
우크라이나 SSR의 형성 과정을 보면, 이는 순전한 외세의 강점이 아니었음. 하리코프/하르키우, 오데사 같은 제2의 인구 및 경제 중심지들은 자체적인 볼셰비키 공산혁명을 통해 자발적으로 신생 소련에 합류함. 러시아는 현지 협력 세력 없이 유럽에서 가장 큰 땅덩어리를 점령할 수 없었음.
예를 들어,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오브셴코(1883-1937)는 우크라이나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러시아 혁명 당시 키예프 소비에트의 주요 지도자였고. 이오시프 퍄탸코프(1887-1938)는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출신으로 소련의 주요 산업화 정책을 주도한 볼셰비키 지도자였음.
라자르 카가노비치(1893-1991)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유대계 소련 정치인으로, 스탈린 시대 가장 강력한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강제 집단화 정책에도 깊이 관여했고. 당시 우크라이나 민족의 적어도 반은 볼셰비키 소련 혁명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음.
우크라이나 민족의 적어도 반은 볼셰비키 소련 혁명에 자발적으로 참여함. 안토노프-오브셴코, 퍄탸코프, 카가노비치, 추바르, 슘스키, 티모셴코 같은 우크라이나 출신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닌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나왔음.
더욱이 우크라이나가 현재 전신으로 추앙하는 1918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조차도 명목상 영토의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전혀 무관했다. 안톤 데니킨(1872-1947) 지휘의 백군, 네스토르 마흐노(1888-1934) 이끄는 아나키스트 흑군, 볼셰비키 적군, 폴란드 세력 등이 그 영토를 점유하고 있었고....
피우수트스키 시절 폴란드 제2공화국조차 우크라이나에 형식적 자치권을 보장하겠다고 했음을 고려하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국(SSR)의 형성이 순전한 외부 강압만으로 이뤄졌다고 보기 어려움.. 르부프, 스타니스와부프 같은 도시들의 역사적 귀속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현재 소련을 100% 외세로 규정하며 역사를 재해석하려 하지만, 이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맞춰 과거를 왜곡하는 시도에 불과함. 대기근 얘기할 때는 소련을 100% 억압자로 취급하다가, 도시의 역사를 물으면 갑자기 "자유로운 공화국들의 굳건한 단합"을 노래하는 모순적 태도는 역사적 진실성과 거리가 멈
한국전쟁 당시 소련군으로 참전한 우크라이나 출신 군인에게 수여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이름의 공적확인 결의서가 키이우 전쟁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출처ㅡ국방일보
소련-우크라이나 관계를 굳이 한국에 대입하자면, 동화론자 친일파들이 망상했던 (조선은 일본과) "대등하진 않지만 중요한 어린 동생"에 가까움..
거기다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 역사관에선 소련 치하의 대기근(1932-1933년 소련 치하에서 발생한 대기근(홀로도모르))은 악랄한 외세의 수탈이지만, 동갈리치아(원래 폴란드 영토, 소련이 나치독일과의 협정으로 받아온) 할양은 아름다운 정교회-소비에트적 형제애고, 본인들이 국부로 받들고 있는 스테판 반데라와 추종자들이 참여한 홀로코스트는 아예 없었던 일임.
물론 우크라이나 애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겠지...
우크라이나가 현재 러시아의 부당한 침공을 받고 피해를 받는거랑 별개로, 우리나라랑 오히려 악연이면 악연이었지. 좋은 관계도, 동병상련을 느끼고 비교할만한 관계도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