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한강, 서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의 목적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다음 날도 당신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을 부정하기 위해 다음 날도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다음 날도 당신을 기다리다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리하여 나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김행숙, 문지기
그녀는 심장이 너무 오래 뛰어서
사랑이 항상 생매장으로 끝난다
가슴에 동글동글 솟아난 무덤엔
아무도 뽑지 않는 무성한 잡초
언젠가 호랑이가 떨어진 수수밭의
떨어져도 죽지 않는 호랑이의
잘못된 기도처럼
붉은 울음
떡 하나만 주면
떡 하나만 주면
착해질 줄 알았는데
(떡은 심장에 좋은 수수팥떡)
그녀는 심장이 너무 오래 뛰어서
가슴 속에 거듭 떨어지는 호랑이가 산다
스무 개의 발톱으로 자기를 묻는다
호랑이가 떡으로만 살 수 있는가
먹어서 배부른 것이 사랑인가
호랑이는 너의 핵심
해님 달님이 먹고 싶었다
그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정한아, 회의적인 육식동물의 연애
모든 사랑은 익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흰 종이배처럼
붉은 물 위를 흘러가며
나는 그것을 배웠다
해변으로 떠내려간 심장들이
뜨거운 모래 위에 부드러운 점자로 솟아난다
어느 눈먼 자의 젖은 손가락을 위해
텅 빈 강바닥을 서성이던 사람들이
내게로 와서 먹을 것을 사간다
유리와 밀을 절반씩 빻아 만든 빵
/진은영, 오필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