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O드라마는 <로마>나 <데드우드>처럼 이미 진부해지거나 낭만화된 장르를 차용하여 이를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내린다. 판타지 장르의 역사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가? 피하고 싶은 클리셰라든가?
"당연하다. 나는 톨킨의 골수팬이다. 난 중고등학교 때 톨킨을 읽었고 그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다른 판타지 소설도 읽어봤지만 톨킨만큼 좋아하진 않았다. 이런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톨킨의 작품이 거둔 성공은 현대 판타지 소설을 재정의했다.
그러나 출판계 주류는 톨킨을 별종으로 취급했다. '뭐, 가끔 가다 이런 별난 책이 나오고 왜인지는 몰라도 잘 팔리지. 하지만 이런 책이 또 나오진 않을 거야.' 톨킨의 아성에 처음으로 도전한 게 70년대 후반 발런타인 북스의 지사인 델 레이 출판사이다. 이들이 출판한 스티븐 R. 도날드슨의 <토마스 코브넌트 연대기>와 테리 브룩스의 <샤나라의 검>이 톨킨의 발자취를 따른 최초의 시도였고, 둘 다 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후 많은 톨킨 아류작이 나왔다.
톨킨의 팬으로서 나는 그런 작품을 많이 읽어보았지만 대부분이 짜증났다. 그 책들은 톨킨을 이해하지 않은 채 톨킨의 최악의 단점들만 모방하고 있었다. 난 톨킨을 좋아하지만 그가 완벽했다고는 생각 않는다. 그래서 톨킨에게 대답하고 싶었고, 그 뒤를 이은 작가들-그 장르를 청소년용으로 만든-에게도 대답하고 싶었다.
나는 역사소설도 많이 읽었는데, 역사소설과 판타지 소설 사이의 간극은 드라마틱하다. 톨킨 모방자들은 배경을 중세 비슷하게 잡지만 그건 꼭 디즈니랜드의 중세 같다. 장식술이니 영주니 그런 게 있지만, 중세가 정말 어떤 시대였는지는 개념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다가 좀더 어둡고 현실적인 역사 소설을 읽으면 성에서 사는 게 어땠는지, 검을 들고 싸우는 게 어땠는지 등에 대해 감을 잡게 된다. 난 역사소설의 현실성에 훌륭한 판타지 소설이 보여주는 마법과 경이를 합치고 싶었다.
내가 역사소설을 좋아하긴 하지만, 역사소설은 결말이 어떻게 될지 알고 읽게 된다는 게 문제다. 가령 장미전쟁에 대해 읽을 때 독자는 왕자들이 탑에서 못 나갈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판타지 소설은 그런 제한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인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길까? 내가 좋아하는 이 캐릭터가 죽을까 살까? 그런 긴장감을 살리고 싶었다."
-당신 책에 나오는 인물들과 상황에는 좀더 복잡미묘한 도덕률이 보인다. 사악해 보였던 사람이 의외로 좋은 사람인 것도 있지만, 명예가 핸디캡이 된다는 그런 테마도 보인다.
"그렇다. 난 항상 회색(도덕적으로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캐릭터들에 끌렸다. 난 50년대 초반 윌리엄 포크너의 노벨상 수상 연설을 신조로 삼고 있다. 그는 쓸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람의 마음 속의 갈등뿐이라 말했다. 나도 그에 동의한다.
많은 판타지 소설이 선과 악의 대결을 주제로 다룬다. 하지만 내 생각에 선과 악의 대결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으며, 우리가 만드는 결정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다. 악이 꼭 검은 옷을 차려입은 추하게 생긴 존재라는 법은 없지 않나. 톨킨이 한 게 이런 것이다. 톨킨이 창조한 악당은 그래도 근사하지만, 톨킨 아류작들에 의해 완전한 클리셰가 되었다. 시커먼 의상과 일그러진 얼굴의 오크 같은 추한 생물들 말이다. 누군가가 못생겼다면 그는 악당인 것이다. 톨킨의 영웅들은 잘생기고 아름답다. 이것 또한 클리셰가 되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나는 톨킨의 팬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난 여기서 톨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톨킨에게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보로미르다. 그는 여러 면에서 전통적인 영웅형이다. 왕자에다 위대한 왕국의 후계자이고, 용맹하고 뛰어난 전사이고...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반지의 유혹에 굴복해버린다. 그랬다가도 무고한 이들을 지키며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보로미르에겐 그런 위대함이 있다.
사루만도 흥미로운 캐릭터다. 백색의 마법사는 선한 쪽에 말 그대로 수백 수천 년을 있었다. 마법사는 인간이 아니라 Maiar라 오래 사니까. 하지만 사루만도 마지막에 역시 굴복해버린다. 이 두 캐릭터에게서 갈등에 싸인 인간의 마음이 드러난다."
-보로미르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은 일에 쓰기 위해 반지를 원한 거다.
"그렇다, 반지를 차지해서 쓰려고 했지. 난 그런 캐릭터들에 항상 끌렸다. 또 한 가지 내가 대답하고 싶었던 건... 난 봉건제 정치사나 로마 정치사 등에 대해 많이 읽었고 현대의 정치에도 관심이 있다. 인상적인 것은, 정치란 지독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판타지 소설은 정치를 단순해보이게 만든다. 좋은 사람이 좋은 왕이 되는 거 말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좋은 왕이 되는 건 아니다. 나쁜 사람이라고 나쁜 왕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내 생애 미 대통령 중 가장 좋은 사람이라면 아마 지미 카터일 것이다. 그는 인간으로서는 최고였다. 그러나 카터는 좋은 대통령은 아니었다. 사람이 좋다고 일이 알아서 술술 풀리는 게 아니다. 나쁜 사람으로 치자면 리처드 닉슨이 있다. 뭐 닉슨이 나쁜 대통령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는 중국과 수교도 이루어냈고, 아주 유능한 대통령이었다. [통치를 하며 어려움을 겪는 두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함, 스포일러이므로 편집됨(←이건 5권의 존과 대니인 듯)] 이들이 결정을 내리는 모습, 그 결정이 불러올 수 잇는 결과, 그 결과가 성공인지 실패인지 그려내고 싶었다. 그러한 과정에 언제나 흥미를 느낀다.
-판타지니까 역사도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신은 현실의 세계, 실제의 역사에서 설정을 빌려와 가상의 세계에 적용했다. 그렇게 해서 얻는 장점은?
"일정한 현실성을 얻게 된다. 판타지를 쓰다 보면 제멋대로 하기가 쉽다. 마법이 특히 그렇다. 내 작품에서는 주류 판타지에 비해 마법의 강도가 낮다. 그런 면에서 난 톨킨의 예를 따르고 있다. 반지의 제왕을 보면 중간계는 아주 마법적인 세계이며 경이롭고 신비한 세계지만, 정작 마법은 별로 안 나온다. 간달프가 주문을 외우거나 파이어볼을 던지거나, 그런 건 나오지 않는다. 싸움이 나면 간달프는 검을 뽑는다. 그의 마법은 불꽃놀이를 하거나 지팡이가 빛나거나 하는 사소한 데에 쓰인다. 마법 반지들도 그렇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반지라면서 정작 하는 건 사람을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것 뿐이다. 아무리 지배력이 큰 물건이라지만, 프로도가 반지를 끼면 나즈굴에게 명령할 수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작동하는 게 아니다. 이런 마법은 그 실체를 알기 어려워서 신비한 것이다. 그런 마법이 좋은 거 같다.
삼류 판타지 소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마법을 너무 강력하게 설정한다는 것이다. 군대 전체를 몰살시켜 버릴 수 있는 강력한 마법사와 마녀와 마도사가 있는데, 거기다 또 군대를 만들어놓는다! 말도 안 된다. 만 명 병력을 눈깜짝할 새에 죽일 수 있는 마법사가 있는데 누가 만 명을 모으려 하겠나.
이런 작가들은 결과를 감안하지 않는다. 이런 강력한 마법사들을 만들어놓고 거기다가 또 왕과 영주들을 만들어놓는다. 당연히 마법사들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을까? 힘이 있다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역사와 도무지 맞지 않는 것들에도 대답하고 싶었다. 가령 역사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정략 결혼이 항상 나오는데, 항상 정략 결혼이 있고 소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마구간 소년과 도망치고... 현실에선 그딴 거 없었다. 중세 천 년 간 귀족들 사이에 수천 수만 수십만 건의 정략 결혼이 있었고 다들 그렇게 살아 갔다.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뭐 딴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마구간 소년과 도망치진 않았다.
또 판타지에 대해 내가 항상 가진 불만은, 무능한 작가들은 중세의 계급사회를 차용한다. 왕족이 있고 귀족이 있고, 상인 계층과 평민이 있고 그런 거 말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그래서 당돌한 평민 소녀가 잘생긴 왕자를 혼내는, 그런 장면을 넣는다. (현실이라면) 잘생긴 왕자는 당돌한 평민 소녀를 강간해 버리거나 창고에 가둬 사람들이 오물을 던지도록 했을 것이다. 계급구조는 강력한 위력이 있다. 계급제는 그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자기 주제를 알고 자기 계층의 의무와 혜택을 알도록 교육받는다. 누군가가 구조에서 벗어나려 하면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걸 반영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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