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새로운 요구를 따라서 우리 여자가 해산(解産)한 가장 큰 것은 여자 교육회올시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가정에 있는 여자들은 편지 한 장도 자신의 손으로 쓰지 못하고 신문 한 장을 마음대로 보지 못함으로 답답한 형편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들은 이에 대하여 약간 느낌이 있어서 동지자 몇 사람이 모혀서 비록 아무 자식도 없으나 가정에 있어서 답답해하는 우리의 자매를 기어이 화를 조직하고 매월 한번씩 통속부인강연회를 열어 집안에 있는 여자들에게 새로움을 주며 새깨임을 주고자 하고 또 그들을 위하야 간단한 상식을 주려고 미구에 종교예배당 안에서 야학까지 열 계획이외다.
저 가정에 귀멀고 눈멀고 벙어리된 자매를 비참한 운명에서 구하야 보고자 합니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14일 : 조선여자교육회 창립 취지)
조선여자의 교육!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올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이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허다하지만 교육 문제처럼 큰 문제는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육문제에서도 가장 급한 것은 여자 교육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의 사회라 하는 것은 본래 사나이와 계집 두 가지로 된 것인데 종래에는 계집은 아무 사람다운 값이 없이 살아오지 아니하였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여자의 큰 수치라고 하나 나는 말하기를 온 인류의 큰 수치라 하겠습니다.
수레 두 바퀴와 같은 남녀의 관계가 종래와 현재에는 한 쪽으로 기울어졌으니까 이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 곧 여자 교육의 필요로 생각합니다.
(동아일보, 1921년 2월 21일 : 여성 교육의 필요성)
(출처: 덕성여자대학교)
차미리사 선생
(독립운동가•덕성학원 설립자)
1879년 6남매 중 막내로 출생 (딸이라 섭섭하다고 섭섭이로 불렀다고)
17세에 결혼 후 3년만에 사별
사별 후 교회에 다니며 기독교인이 됨
1901년 중국 유학
1905년 미국 유학 중 동포들과 대동교육회를 조직
교육운동, 독립운동 등에 힘씀
1912년 귀국 후 배화학당 교사로 활동
1920년 독립조선여자교육회 조직, 부인야학강습소 설치
1921년 전국순회강연단 조직
1923년 근화학원 설립
1938년 일제의 압력으로 덕성학원으로 개명
1940년 일제의 압력으로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남
이때 새 교장이 된 사람이 송금선 (친일파, 덕성여대 초대 학장)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