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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 ‘방판’의 추억을 되살리며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식의 웃음 주는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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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9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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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편견 가로지르며…

왜곡된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유쾌한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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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30년 전 배경, 성인용품 방판
섹슈얼리티 속에 은폐되었던 진실
억눌리고 눈치 보던 성 관념 흔들

어불경한 쾌락이 아닌 성스러운 쾌감
특수 형태 여성 노동의 문제도 제기
음지에 숨은 부조리를 양지로 꺼내

기억 하나. 커다란 가방을 든 ‘아줌마’가 방문하면, 커다란 가방 안에서는 갖가지 화장품이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왔다. 얼굴에 팩을 바른 중년 여성들이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수다를 떨 때의 대화는 어딘가 은밀하고 즐거운 톤을 띠고 있으며, 아이들에게 들릴까봐 한껏 소리를 낮추었다. 

기억 둘. 한때 녹즙 열풍이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아침마다 윙윙거리던 녹즙기 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마다 문고리에 걸려 있는 파우치 음료로 바뀌었다. 몇달에 한 번씩, 카탈로그와 신제품을 바리바리 짊어진 판매원이 이것저것 맛을 보여주었다. 

기억 셋. 집에 찾아오는 학습지 선생님을 피해서 숨어 있던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 거기에는 나처럼 장롱 밑에 밀린 학습지를 쌓아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어린이들은 먼 훗날, 방문 학습지 교사의 노동 실태를 알고 뜨거운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기억 넷. 친구 따라가는 강남보다 짜릿했던, 첫 성인용품점 방문. 음침하고 민망한 분위기에서 성희롱이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하는 우려와 달리 화사하고 아기자기한 공간에서 여성 사장님이 반겨주었다. 그는 친절하고 다정한 태도로 전문 지식을 뽐내며 고객 맞춤 제품을 추천했다.

 지난 10월 방송을 시작한 <정숙한 세일즈>(JTBC)를 보다 보니 이 모든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정숙한 세일즈>는 1992년 금제라는 가상의 시골 마을에서 여성 4인방이 무려 ‘성인용품 방문판매’에 뛰어들며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담은 코미디다.


주인공 한정숙(김소연)은 우연한 기회에 성인용품 방문판매를 시작한다. “‘성(性)’이 금기시되던 그때 그 시절”이라는 드라마의 공식소개처럼, 30년 전의 한국 사회에서 성인용품을 팔겠다는 여성 주인공의 선택은 마른 짚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일처럼 보인다. 성 문화가 훨씬 개방적으로 변화했다는 2024년에도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이중잣대 속에서 억압과 해방의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여성의 성은 ‘믿을 만한 남성에게만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개방되어야 하며 스스로 그것을 향유하거나 감히 휘두르려 하면 안 됨’ 정도로 취급된다. 음란하다는 평판은 여성을 고립시키는 공격이며, 동서고금을 막론한 유효타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숙은 마을 사람들에게 냉대와 비난을 받는다. ‘야시꼬리한 물건’을 팔며 마을에 분란을 일으킨다는 수군거림이 따라붙고, 정숙의 엄마마저 남사스러운 짓을 하고 다닌다며 비난한다. 


어느 날 정숙의 집 담벼락에 성적인 낙서 테러가 가해지는데, 비난은 범인이 아니라 ‘선량한 남성 시민’이 그런 짓을 하게 만든 정숙을 향한다. 남자 동창은 방문판매를 해달라는 거짓말로 정숙을 유인해 강간하려 한다.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낙인이 찍힌 여성은 보호할 가치가 없다는 인식은, 말로 표현하면 기이하지만, 사회제도나 사람들의 무의식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성범죄 피해자가 평소 얼마나 ‘정숙’한 여성이었는지, 혹시 가해자에게 ‘여지’를 주지 않았는지, 그때 옷차림은 어땠는지 등은 남성 중심적 법률 체계에서 언제나 중요한 요소이다. 여성은 여성대로, 낙인찍힌 여성과 즉시 구별 짓기를 하여 자신은 ‘그렇게’ 더럽지 않으며 ‘내’가 속한 ‘여성 집단’ 역시 ‘그 정도로’ 저급하지 않음을 증명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정숙은 “(손님이 없어도) 주인이 샷따를 내리지 않으면 장사는 하는 것이다”라고 외치며 굳세게 일어난다. 게다가 정숙에게는 ‘방판 시스터즈’가 있다. 정숙처럼 집안의 가장이라서 방문판매를 시작한 서영복(김선영) 외에도, 차밍 미용실을 운영하는 주리(이세희), 그리고 시스터즈의 든든한 지원군인 금희(김성령)가 늘 정숙과 함께다. 


한부모 가정에게 쏟아지는 차별과 편견의 폭력을 생각하면, 무려 1980년대에 혼자 아기를 낳아 키우는 ‘미혼모’ 주리의 인생 난도는 아득하다. 그럼에도 당당하고 발랄한 주리는 처음부터 정숙이 판매하는 물건에 호기심을 보이며 적극적이다. 순결로 여성을 평가하는 행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런 잣대에 연연하지 않기에 주리는 자유롭다. 그래서 주리는 가장 용감하고 품위 있다. 

금희는 영문과를 졸업한 엘리트 여성이자 약사의 아내로, 부유하고 안정적인 삶을 누린다. 그러나 어딘가 갑갑하고 따분하다는 감정을 느끼던 중, 내조 잘하는 사모님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남편이 질색하는 방문판매를 시작한다. 


금희에게 방문판매는 외부의 규범과 금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찾기 위한 싸움이다. 이들은 의기투합한다. 정숙이 성폭력 피해자임에도 2차 가해를 걱정하여 주눅 들자, 4인방이 일명 ‘환불 메이크업’을 하고 경찰서에 들이닥치는 장면은 코미디로서도 압권이지만, 여성 연대의 차원에서도 국밥을 쏟은 듯 가슴을 뜨끈하게 데운다. 


또한 평소 정숙을 비난하던 마을 주민들이 가해자의 주장보다 정숙을 믿으며 지지하고 나선다. 물건을 파는 건 싫지만, ‘이 문제’에서는 정숙의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영복에게는 남편 종선(임철수)이 전과자라는 비밀이 있다. 금희에게 이 사실을 들킨 영복은 전전긍긍한다. 

금희는 그런 영복을 따스하게 감싼다. 금희 또한 그 시절 장남의 아내로서 딩크족을 선택했기에,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갗으로 겪었다. 그것이 서로 다른 차원의 경험이라도 말이다. 이렇게 조금씩 소수자성을 지닌 인물들이 특별하거나 유난스럽지 않게 이야기 안에서 활개 치는 균형이 절묘하다.

여성 연대의 다른 한 축은 나중에 정숙을 승진까지 시켜주는 ‘판매량’이다. 정숙이 아무리 당당하고 굳세어도 장사가 안되면 일을 계속할 수 없다. 정숙의 방문판매를 처음 마주한 여성들은 소스라치고 기겁하지만, 은근슬쩍 손을 들어 구매 의사를 밝힌다. 


코미디에서 빠지지 않는 패턴 중 하나가 바로 아내의 샤워 소리나 정성 들인 반찬을 무서워하는 중년 남성의 이미지다. 이는 중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과잉의, 처치 곤란의, 잉여의 것으로 치환하여 비가시화하거나 조롱의 대상으로 만든다. 여성을 숭고한 어머니와 아내라는 역할로 한정하여 탈성애화하는 전략은 여성의 욕망을 삭제하여 가정을 지키려는 전략이다. 


하지만 <정숙한 세일즈>는 중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자연스럽게 다룬다. 판매하려면 파는 사람이 물건에 대해서 가장 잘 알아야 한다는 직업윤리에 입각하여, 정숙은 직접 바이브레이터를 써본다. 마을 사람들의 음담패설에도 놀라 도망가고, 남편이 적극적인 여성을 싫어해서 늘 맞춰주기만 했다던 정숙이 그날 경험하는 쾌감은 밤하늘에 터지는 불꽃놀이로 연출된다. 


하루 종일 갯벌에서 진흙투성이가 되어 조개를 캐는 촌부도 성관계할 때 질에 바르는 젤에 관심을 보인다. 자신의 섹슈얼리티가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것임을 알 때, 그 새삼스럽지 않지만 은폐되었던 진실을 금제의 여성들은 킬킬거리며 공유한다. ‘아. 너무 끼고 싶어요.’

<정숙한 세일즈>가 건드리는 이슈 중 또 하나는 여성 노동이다. 방문판매 시스템은 지극히 한국적이고, 젠더화된 노동이다. 방문판매는 조선시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팔던 방물장수에서부터 유래하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시스템화한 것은 1960년대 초 화장품 회사이다. 판매원이 집집마다 방문해서 직접 물건을 파는 방문판매는 판매원 개인의 마케팅 능력과 구매자 여성들의 네트워크, 판매원과 구매자의 신뢰 관계에 의존한다는 특성이 있다. 


화장품 회사의 부흥을 이끌었던 방문판매는 1990년대 이후 IMF 금융위기로 인해 많은 여성이 판매직에 뛰어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도 했다. 정숙과 영복이 방문판매를 시작한 1992년은 여성의 초혼 연령이 25세였던 시대다. 기혼-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일자리는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다. 그럼에도 정숙과 영복처럼, 어느 시대에나 여성들은 일했다.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경향신문 젠더기획팀 지음, 휴머니스트, 2022)와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김은화 지음, 딸세포, 2019)는 이런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에 속하는 방문판매 노동자들은 사적 공간에 혼자 들어간다는 특수성 때문에 여러 위협에 노출되기 쉽고, 정규직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각종 제도에서 보호받기 어렵다. 이런 문제는 정숙이 혼자 방문판매를 하러 갔다가 위험에 빠지는 장면으로도 나타난다. 사회구조가 변화하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출현하는 지금, 웃다가도 여성 노동 문제를 생각하게 만드는 코미디의 존재는 이토록 소중하다.

12부작인 <정숙한 세일즈>는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모든 것을 엿듣기와 엿보기로 해결하는 남자 주인공 도현(연우진)의 존재가 생뚱맞긴 하지만, 빠지면 섭섭한 게 로맨스니까 이 정도는 넘어가자. 금기와 편견을 가로지르는 4인방의 유쾌한 완주를 기대한다. 


https://naver.me/xVBWZPg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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