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병원 장례식장 옆에는 비석이 하나 있다.
이 비석은 억울하게 학살당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어째서 병원 장례식장에 왜 이런 추모비가 세워지게 된 걸까?
이 추모비에 대해 설명하려면 7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북한은 6.25 직전까지 자신들의 침략 의도를 숨기기 위해
'우리는 같은 동포인데, 서로 손잡으면 이 세상 이루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라며 평화를 위해 대화하자며 유화 공세를 이어나갔고
북한의 침략 의도를 모른채 유화 공세에 방심한 대한민국 정부는
사병들을 대거 농번기 작업을 도우기 위해 휴가를 보낸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일요일 새벽 네 시에 무방비한 틈을 타서 침공을 감행했고
국군은 필사적으로 인민군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무방비 상태로 인민군에게 기습당한 국군은
결국 개전 사흘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게 된다.
당시 북한의 전력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
국군이 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사관 생도들까지 전장터로 보냈으나
이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선이 순식간에 붕괴되어
살아남은 이들은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히지 않기 위해
지휘 체계 없이 필사적으로 패주하는 상황이었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서울 시민들을 지켜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최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정부 요인들과 국회의원들마저
너무나도 다급했던 상황이라서 상당수가 피난가지 못하고
인민군에게 사로잡혀 북한으로 끌려갔을 정도였다.
당시 한국은행에 있던 수십톤의 금괴와 장서각에 있던 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화재 등
'사소한' 것들은 미처 손써보지도 못하고 북한에게 노획당하였을 정도여서
군경과 공무원을 비롯한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인민군에 의해 도륙당하거나 납북당했고
납북당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전후 '단장의 미아리 고개' 가 유행했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인민군이 서울에 들이닥치면서
북한의 기습에 맞서싸우다 부상을 입은 병사들이 치료를 받던 서울대 병원에서는
부상을 입은 병사들이 탈출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인민군들에게 제네바 협약에 보장된 '인도주의적 처우'를 보장해달라고 호소했다.
원래 제네바 협약에서 부상병은 인도주의적 대우를 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고
인간이 어디까지 광기를 가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세계 2차 대전 당시에도
제네바 협약에 비준하지 않았던 소련을 상대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가 최소한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는 '척' 이라도 했었기에
서울대 병원에서는 '설마 같은 동포인데 다친 부상병들을 가혹하게 다루겠나' 하고 인민군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서울대 병원에 들이닥친 인민군들은
'공화국에 대적한 원쑤놈들은 살려줄 가치가 없다' 라며
저항할 힘조차 없던 국군 부상병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인민군들은 국군 부상병들을 처음에는 총으로 쏴죽였지만
나중에는 이들을 처형하는데 중요한 전시물자인 총알을 낭비하기 아깝다는 이유로
저항도 하지 못하는 국군 부상병들을 잔인하게 때려죽이고 찔러죽였다.
그리고 이렇게 국군 부상병들을 학살하고 난 뒤에는
일반 병실로 눈을 돌려서,
'이렇게 좋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놈들은
인민의 고혈을 빨아먹은 부르주아 반동분자가 틀림없다!' 라며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민간인들까지 똑같이 잔인하게 처형했다.
심지어 인민군들은 피에 굶주린 악마마냥
정신병동에 입원한 이들이나 지하실에 숨은 이들까지
일일히 찾아다니며 철저하게 학살한 결과
당시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 중 살아남은 사람은
인민군들이 들어오기 전에 눈치 빠르게 도망친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렇게 억울하게 학살당한 사람은 천 여명에 이르렀는데
인민군들은 서울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
'니들도 우리 눈에 거슬리면 이렇게 된다.' 라는 의미로
무더운 여름 날씨에 시체들을 한 달 동안 밖에 내버려 두고서
시체가 부패하여 악취가 나고 구더기가 들끓자
마지못해 시체들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여서 소각해버렸다.
다만, 인민군들은 일부 의료진들은 살려주었는데
이는 부상당한 인민군 장병들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나중에 인천상륙작전 이후 자신들이 쫒겨나게 되자
능력이 뛰어나지 않거나, 자신들에게 협조적이지 않은 의료진들을 죄다 학살하고
남은 의료진들은 북으로 끌고가 버렸다.
우리가 아는 백병원의 의사양반도 이 과정에서 북으로 끌려가서
이후 의사양반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정신나간 학살극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점은
바로 자발적으로 인민군에 협력한 과거 남로당에 몸을 담았던 이들의 모습이었다
이들은 인민군이 당도하기 전만하더라도 평범한 의료진이었지만
인민군이 당도하자 거리낌없이 자신의 동료나 환자들을 팔아넘겼다.
위의 인용문에서 당시 의사의 말 믿고 지하실로 숨은 사람들은
인민군 군의관으로 돌아온 서울대 교수가
'이승만 괴뢰도당이 패주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는데
이러한 기쁜 상황에서 떳떳하지 못하고 숨어다닌 놈은 처형할 가치도 없다!' 라고
얼굴 빛 하나 바꾸지 않고 수십톤짜리 석탄 더미에 깔아뭉개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희생당한 이들은 자기와 함께 식구처럼 일했던 의료진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자기와 얼굴 마주보고 같이 일한 동료들을
이렇게 으샤 으샤 하면서 기뻐하면서 죽였다고 하는 걸 보면 소름이 돋는다.
역사 이래 광기의 대명사로 불릴 만한 사건은 많았지만
자신의 동료들이 학살당하는 모습을 즐거워 하는 모습은 악마도 기겁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매년 6월이면 이렇게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제를 갖고 있지만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러한 살육의 참상을 겪은 사람들이 서울대 병원 한 켠에 세워둔 추모비에는
아래의 글귀가 적혀 있다.
아무리 이념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죄 없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이러한 학살을 자행한 인민군과 월북한 이들은
어느 누구도 이러한 만행에 대해 단죄당하지 않았고,
학살을 벌인 것으로 추정되는 제 9 전차 여단장 류경수는
북한에서 오히려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북한에서는 제 9 전차여단을 제 105 탱크 사단으로 개편한 다음
류경수가 서울을 점령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단명을 '근위 서울 류경수 제 105 탱크 사단' 이라고 명명한 상황이니
아무리 역사가 선악을 심판하는 법정이 아니라지만 기가 찰 일이다.
게다가 가장 안타까운 점은 이 사건이 너무나도 참혹한 나머지 잊혀져 버렸다는 점이다.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반공교육에나 나올법한 걸 믿으십니까?' 라며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오히려 면박당하기 일쑤다.
아무리 이념이 중요하다지만
사람이 먼저고 이념은 그 다음인 게 당연할텐데
그 이념이 뭐라고 이렇게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니 너무도 슬프다!
참고로 본문에 인용한 만화는 보훈부 서울북부보훈지청이
해당 사건에 제발 알아달라고 배포한 만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