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1911년 꽤 매력적인 논문을 발표한다. 그걸 책으로 펴낸 것이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인데, 이런 문장이 있다. “예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없는 시대, 즉 참된 정신적 양식이 결여된 시대는 정신세계에서 퇴보시대이다. 영혼은 높은 변에서 낮은 변으로 끊임없이 하강하며, (중략) 이런 시대의 인간들은 특수하고 두드러진 가치를 외적인 성공에 두게 된다. 그들은 단지 물질적인 부유를 얻으려 애태우며, 육체를 위한 기술적 진보만을 위대한 일로 찬양한다. 참된 정신적 능력은 과소평가되고 무시되고 있다.”
113년 전에 한 말인데, 현재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양상을 그대로 예언한 것 같다. 특히 한국 사회를 두고 한 말 같다. 모든 면에서 두드러진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칸딘스키가 미래 사회가 어떤 길을 걸을지를 꿰뚫어 보았거나, 한국 사회가 도식적인 타락과 몰락의 길을 상상력 없이 그대로 따랐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됐다. 나라가 부유해지면 문화적 품격이 함께 높아지고, 다양한 문화가 생겨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이 정해진 법칙처럼 진행되리라고 믿었는데 착각이었던 것 같다. 텔레비전과 유튜브는 충격적인 식탐을 보여주는 먹방과 여행, 가볍고 말초적인 허위의 말장난으로 가득하다. 비주류여야 할 하위문화(subculture)가 오히려 주류가 됐고, 주류문화는 어디로 밀려났는지 찾기도 어렵다.
칸딘스키의 진단대로라면 그 원인은 예술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실종이다. 1991년 3월15일 개관한 <학전>이 2024년 3월15일 문을 닫았다. <학전>이 존재했던 33년 동안 한국이 일군 부가 대견했는지 입만 열면 세계적인 부국이라고 자랑하는데, <학전> 하나를 유지하기 어려운 이상한 나라가 되었다. <학전>의 가치가 늘어난 부에 따라 지킬 필요가 없는 가치가 된 것일까?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적인 상황은 다른 분야에서도 발견된다. 시집은 천 권 팔리는 일이 드문 시대가 되었다. 시인들의 시집은 시인들끼리만 읽는다는 자조적인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시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분석하기도 하지만, 어렵지 않은 시들도 많다. 그런 시집들조차 팔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돈은 도구다. 도구가 풍부해지면 일굴 것이 많아지는 법인데, 문화가 풍부해지고 다양해지는 것이 아니라 편협한 하위문화로의 쏠림 현상만 강해지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돈은 편협한 도구가 되었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목적 자체가 되었다. 도구가 목적이 되면 과정의 가치가 사라진다.
하위문화라고 해서 무시할 이유는 없다. 취향도 다양한 층위가 존재해야 하니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다양한 층위의 문화는 함께 존속해야 한다. 다만, 어느 층위의 문화는 사라지고 특정 층위의 문화만이 득세한다면 그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문화는 언제나 현재를 증명한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사회적 구성원들의 취향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증명한다.
하위문화가 주류가 되고, 전면에서 다른 층위의 문화들을 말살해가고 있다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겠는가? 돈에게는 책임이 없다. 누군가를 죽인 흉기가 살인사건의 주범이 아닌 것처럼, 돈은 주범이 아니다. 돈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면 안 된다.
돈으로 명화를 살 수는 있지만, 명화는 알파와 오메가가 아니다. 명화는 예술을 사랑하는 예술가와 후원자들에 의해서 탄생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명화를 그리는 사람을 살 수는 없다. 명화는 명화가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돈에 의해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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