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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케이팝] 누구도 에스파를 막을 수 없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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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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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처음에는 ‘왜’였다. 시비를 걸자는 게 아니다. 왜 다시 돌아 에스파인가를 함께 이야기 나눠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2024년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는 K팝 사회에서 데뷔 5년 차 그룹 에스파에 대한 검증은 이미 할 만큼 해 검수 기간이 끝난 지도 오래라고 생각했다. 2020년 11월, 데뷔 당시 에스파를 주목하게 만든 건 현실에 존재하는 멤버들과 가상 공간의 아바타가 하나의 그룹으로 활동한다는 다소 파격적인 설정이었다. 멤버 이름 앞에 아이(æ)를 붙인 가상 멤버를 포함한 8인조로 이들을 소개하는 이가 많았고, 아직도 인터넷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잔재가 발견된다.

‘광야’와 ‘싱크(SYNK)’, ‘나비스(nævis)’ 등 세계관을 공부하지 않으면 도무지 진도를 따라갈 수 없는 형이상학적 단어가 난무하는 동안 깜짝 히트곡도 터졌다. 2021년 에스파의 세 번째 디지털 싱글 ‘Next Level’은 손목을 반대로 꺾는 독특한 안무와 함께 그 해를 대표하는 곡으로 자리했다. 여기에서 지금 에스파여야만 하는 첫 번째 힌트가 등장한다. 노래 ‘Next Level’은 K팝을 오랫동안 지켜본 이라면 누구나 앞으로 굴러도 뒤로 굴러도 의심할 여지 없는 전형적인 SMP였다. 스카우터를 터뜨리겠다는 듯 극한까지 밀어붙인 베이스, ‘절대적 룰을 지켜’, ‘적대적인 고난과 슬픔’, ‘감당할 수 없는 절망’처럼 불분명한 대상 앞에 한없이 심오한 노랫말, 당장이라도 눈앞의 모든 걸 부술 것처럼 굴다가는 느닷없이 감미로워져 버리는 특유의 비정형적 곡 구조까지 모든 것이 그린듯했다. 한창 유행하던 레트로의 ‘SM 버전’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고증에 충실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그렇게 영원히 광야와 SMP 안에 갇혀 있을 것 같던 이들이 자신들의 색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건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2023년 5월 발표한 세 번째 미니앨범 [MY WORLD]와 타이틀 곡 ‘Spicy’가 물꼬를 텄다. 공교롭게도 당시 에스파의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는 타 엔터테인먼트사와 인수합병을 타진하는 위기 아닌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K팝계의 인수합병은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인수 대상이 SM엔터테인먼트라는 사실은 계약 당사자뿐만이 아닌 해당 레이블의 음악을 듣고 자란 많은 이들을 동요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K팝에서는 드물게도 ‘레거시’라는 단어가 자주 소환됐다. 만약 K팝에서 지금까지도 거의 전무하다 할 수 있는 장르명 SMP를 그 레거시의 대표 증거로 내세울 수 있다면, 에스파는 바로 그 레거시를 지금 시대와 멤버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새롭게 비틀어 대중까지 설득하는데 성공한 드문 그룹이었다. 특히 ‘Spicy’를 통해 기존의 세계관이나 그에 따른 음악, 비주얼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에스파만의 하이틴 감성을 유연하게 접목하며 자신들의 숨은 저력을 슬쩍 선보였다. 이것이 두 번째 힌트다.

세 번째 힌트는 올해 들어 본격화되었다. 2024년,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던 에스파의 어깨에 비로소 커다란 날개가 돋았다. 지난해 ‘Girls’나 ‘Drama’ 같은 심오한 SMP를 한 손에, 다른 한 손에는 영미권 하이틴 팝 색채를 듬뿍 담은 ‘ICU’나 ‘Better Thing’를 들고 이리저리 저울질 해보던 이들은 지금껏 시도해 본 여러 배합 가운데 최적화된 비율을 기어코 찾아낸다. 그 밀도 높은 결과물은 지난 5월 말, 앨범 커버를 장식한 미스터리 서클처럼 예고 없이 갑작스레 등장했다. 에스파의 첫 정규 앨범 [Armageddon]의 선공개 곡 ‘Supernova’와 타이틀 곡 ‘Armageddon’은 K팝과 한국의 여름을 말 그대로 몽땅 사로잡아 버렸다. 특히 K팝 팬들 사이 반농담처럼 여겨지던, 가상의 멤버가 존재한다는 저 너머의 세계는 앨범 전반을 통 튼 메카닉(Mechanic)한 이미지로 수렴되며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를 마친 음악과 능숙하게 조응했다. 공사장에서 들려도 어색하지 않은 둔탁한 쇳소리가 거칠게 날을 부딪히는 사이 ‘쇠맛’이라는, 에스파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절묘한 단어도 부상했다. 이지리스닝이니 경영권을 둘러싼 다툼이니 하는 K팝을 둘러싼 그 어떤 소란 속에서도 나만의 길을 가겠다는 뚝심의 발로였다.

우리가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는 모두 바로 지금 에스파여야 하는, 에스파일 수밖에 없는 이유 모음집이다. 수 십 년을 갈고 닦아 완성한 SMP의 성골. 순간의 반짝임이나 유행에 팔랑이지 않고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의 유산을 우직하게 지켜 나가는 태도. 모두가 힙한 걸 쿨하다고 말할 때 쿨을 쇠의 냉기로 치환하는 센스로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나만의 ‘쇠 맛’을 개척한 기획의 묘. 에스파는 이러한 다양하고 까다로운 공정을 통해 대체할 수 없는 에스파만의 독자성을 담보했다.

첫 정규 앨범이 남기고 간 열기가 채 식기도 전, 에스파는 다섯 번째 미니 앨범 [Whiplash]로 돌아왔다. 앨범 제목과 동명의 타이틀 곡 ‘Whiplash’는 이제 올라올 만큼 올라왔다 싶은 바로 그 곳에서 다시 한번 과감하게 끓는점을 올린다. 하우스에 테크노를 버무려 특유의 쇠 맛을 깊게 우려내고, 지금 한반도 ‘쇠 맛 영상계’에서 이보다 더 잘할 수 없는 탁월한 영상 감독 멜트미러를 선택해 온통 쇠 맛으로 채운 한 상을 가득 차려낸다. 첫 맛에서 끝 맛까지 잡내 없는 개운함을 느끼고 나면 ‘이게 원조의 맛인가’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과거와 현재에 미래까지 부담 없이 얹혔다. 적어도 지금은, 누구도 에스파를 막을 수 없다.

https://ch.yes24.com/Article/View/56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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