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물리학과 20학번 박수빈씨
‘고체 상태에서의 전자결정’ 최초 관측
“젊은 과학자 일자리와 과학교육 손봐야”
김근수 연세대 물리학과 교수(왼쪽)와 박수빈 물리학과 석박사통합과정 대학원생이 지난 22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과학관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
세계 최초로 ‘고체 상태에서의 전자결정’ 관측에 성공한 국내 연구진 논문이 지난 16일 국제 과학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게재됐다. 연구를 주도한 김근수(42) 연세대 물리학과 교수와 논문의 제1저자인 물리학과 석박사통합과정 대학원생 박수빈(26)씨는 과학자로서의 성취감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10년 넘게 과학자 진로를 걸어도 미래에 ‘백수’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크다”며 “100년 뒤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기초과학에 대한 과감한 인적 투자와 교육 혁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국민일보는 지난 22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과학관에서 두 사람을 인터뷰했다. 박씨는 “과학고도, 영재고도 아닌 지방 일반고를 졸업한 평범한 학생”이라고 밝혔다. 박씨는 2020년 연세대 물리학과에 입학해 같은 학교 물리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26세의 젊은 과학자다.
그는 왜 의대가 아닌 물리학과를 선택했는지 묻자 “고등학교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배운 순간 ‘이거다’ 하는 느낌이 들어 진로를 확정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고 답했다. 전교 1등은 아니었지만 물리 시험만큼은 3년 내내 한 번도 틀린 적 없을 정도로 열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김 교수는 박씨와 같은 인재를 더 배출하기 위해서는 과학자가 갖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학자가 되면 졸업 후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 백수가 될 수 있다는 막연한 공포가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정부와 민간이 과학계에 과감히 투자해 젊은 과학자들의 일자리 걱정을 해결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젊은 과학자들이 직면하는 어려움 중 하나가 가시적 보상의 부재다. 박씨도 연구 과정에서 문득 찾아오는 막막함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뚜렷한 성과 없이 지루한 실험만 반복되는 생활이 끝없는 터널처럼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박씨 같은 젊은 과학자 입장에서는 당장 성과가 날 것이란 보장이 없고, 교수처럼 안정된 일자리의 보상이 올 것이라는 확신도 없으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앞설 수밖에 없다.
김 교수는 박씨의 물리학에 대한 남다른 집념이 이번 연구를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밝혔다. 그는 “연구는 100m 달리기가 아닌 마라톤에 가깝다”며 “하나의 주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연구를 하지 말라고 주변에서 뜯어말려도 본인이 심취해 욕심을 낼 정도의 정신력이 동반돼야 유의미한 성과가 나온다”고 설명했다.
박씨가 관측한 전자결정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헝가리 출신 과학자 유진 위그너가 1930년대에 최초로 제안한 개념이다. 고체 물질 안에서 전자가 규칙적인 배열을 이뤄 고정된 상태를 이루는 현상을 일컫는다. 100여년간 미국 일본 영국 등 내로라하는 과학 강국에서 전자결정을 관측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하며 과학계의 오랜 난제로 남아 있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박씨는 이번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 지루한 실험 작업을 수없이 반복했다. 알칼리 금속 표면을 특정 농도로 도핑한 다음 방사광가속기 등을 이용해 정밀측정하고, 유의미한 데이터가 나오지 않으면 이 작업을 농도만 바꿔서 다시 진행하는 식이다.
김 교수는 “기초과학 실험은 단기간에 성과가 나오는 분야가 아닌데, 이런 어려운 과정을 도와준 게 우리 연구팀 학생들”이라며 “학생들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번 연구 성과에 대해 “전자결정이 고온초전도체 원리를 규명하는 열쇠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고온초전도체 원리를 풀어내면 전력 손실 없는 에너지 전달과 운송수단 효율 극대화가 가능해지는 ‘에너지 혁명’이 찾아올 것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또 “연구 인프라 확충과 금전적 지원도 물론 중요하지만 정부·민간 투자 차원에서 인재들의 일자리 확충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며 “기초과학은 5년, 10년 뒤가 아니라 50년, 100년 뒤의 변화를 위해 투자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현재 초·중·고교에서 이뤄지는 과학 교육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표했다. 김 교수는 “어린 학생들이 특정 프로젝트에 1~2년씩 시간을 쏟아붓기는 어려우니 문제풀이식 교육을 하는 것은 이해한다”면서도 “과학자 육성을 위해서는 억지 문제풀이보다는 연구자로서의 마인드를 길러주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 과정을 보면 영재고나 과학고조차 연구에 필요한 능력보다 단순히 고등교육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김 교수는 “20세에 배워야 할 지식을 17세에 가르치는 상황”이라며 “현실적 한계가 물론 있겠지만 창의성 넘치는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다각도의 변화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로 네이처에 등재된 최연소 제1저자 반열에 오른 박씨는 “졸업 후 해외 대학에서 연구원(포닥) 생활을 한 뒤 국내에서 교수가 돼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과학자를 꿈꾸는 어린 후배들에게는 “꼭 머리가 비상하지 않아도 노력만 있으면 과학자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고 전했다.
김지훈 기자(germa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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