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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 국민투표가 위조였다고? 스위스의 ‘거래된 민주주의’ [평범한 이웃,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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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9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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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직접 민주주의 제도가 위기에 처했다. 서명 수집 대행사의 조직적인 서명 위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정부의 미적지근한 대응은 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

 

스위스인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정밀한 시계? 알프스 절경?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진지하게 묻는다면 ‘직접 민주주의 제도’라는 답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국민 누구나 법안을 발의할 수 있고 그 법안이 투표를 통해 시행될 수 있는 시스템 말이다. 늑대 사냥 허용 같은 비교적 가벼운 사안에서부터 이민 제한이나 연금개혁 같은 중대 사안에 이르기까지, 스위스 국민은 대리인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직접 표명할 기회를 누린다.

 

그런데 세계의 찬탄을 받아온 이 시스템이 최근 위기에 처했다. 일시적 위기가 아니다.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스위스 양대 일간지 중 하나인 〈타게스 안차이거〉가 “우리 민주주의의 실패(ein Fiasko für unsere Demokratie)”라는 단정적 표현으로 우려를 나타낸 스캔들이다. 이 ‘실패’가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보기 전, 생각보다 복잡한 스위스의 정치제도에 대해 먼저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다.

 
 


스위스는 26개 칸톤(주)으로 이뤄진 연방국가다. 원래 독립된 나라였던 각 칸톤은 외세에 대항하며 힘을 합치기로 했다. 13세기에 세 개 칸톤이 첫 연맹을 맺은 것을 시작으로 조금씩 덩치를 키우다가 1848년 연방헌법을 제정하며 지금의 스위스가 탄생했다. 각 칸톤에서 고루 뽑힌 의원들이 연방의회를 구성하고 여기에서 선출된 각료들이 연방 내각을 구성한다. 연방제는 분명 대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띠지만 스위스인들은 독립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공식 언어 4개, 칸톤별 독립적 입법·사법·행정 시스템, 그리고 ‘국민투표’가 그 결과다. 국민투표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 국민제안(popular initiative)은 국민이 직접 법안을 발의해 투표에 부치는 것이다. 둘째, 의무적 국민투표(mandatory referendum)는 정부가 헌법 개정이나 국제 조직 가입처럼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국민의 의견을 묻는 필수 절차다. 셋째, 선택적 국민투표(optional referendum)는 이미 의회에서 통과된 법안에 반대 의견이 있는 국민이 이를 다시 투표에 부치는 것이다. 투표마다 성립 요건이 다르다. 이번 스캔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중에서도 국민의 뜻이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국민제안’이다.

 


국민제안은 국민이 직접 법안을 내놓는 것인데, 일반 법률이 아니라 헌법 개정안만 해당한다.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 국민제안 위원회(7~27인)를 꾸린 뒤 안건을 작성해 제출하고 18개월 동안 10만명의 동의 서명을 얻으면 안건이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서명은 투표권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고 이름과 주소, 생년월일을 자필로 써야 한다. 서명 수집은 안건이 투표장에 오를지 결정하는 핵심 요건이므로 그 유효성을 검증하는 절차도 있다. 한국의 지역 주민센터에 해당하는 각 게마인데(Gemeinde)에서 해당 지역에서 수집된 서명을 확인하고, 다음으로 스위스 연방의회사무국에서 전체 서명을 확인한다. 투표에서 다수결로 안건이 통과하면 그 즉시 발효된다.

스위스 최초의 국민제안은 1893년 8월20일 투표에 부쳐진 ‘기절 없는 가축 도살 금지 국민제안’이다. 도살당하는 가축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반드시 먼저 기절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법안으로, 찬성 60.11%로 통과되었다. 이후 2024년 현재까지 131년 동안 서명 수집 요건을 충족시켜 투표에 부쳐진 국민제안은 총 235건, 그중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된 안건은 26건이다. 생각보다 많지 않다. 누구나 제안이 가능하다 해도 그것이 실제 법안으로 이어지기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여기까지가 스위스 직접 민주주의의 핵심인 국민제안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국민이 발의한 법안이 투표에 부쳐지려면 지지자들 10만명의 서명이 필요하다. 이름, 주소, 생년월일을 기입해야 하는 서명용지 샘플. ©스위스 정부 웹사이트 제공

국민이 발의한 법안이 투표에 부쳐지려면 지지자들 10만명의 서명이 필요하다. 이름, 주소, 생년월일을 기입해야 하는 서명용지 샘플. ©스위스 정부 웹사이트 제공

 

 

민주주의 거래하는 방법은 ‘위조’



그러면 이 과정 중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걸까. 서명 수집 단계다. 10만 건이라는 서명 개수는 무엇을 뜻하는가. 인구 900만명인 나라 스위스에서 어떤 법안의 탄생을 바라는 국민의 수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임을 나타내는 지표다. 10만명이 원하는 내용이라면 국가 예산을 들여서라도 투표장을 열어 전체 국민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는 의미다. 서명은 보통 안건 제안자들이나 자원봉사자들이 출퇴근길 기차역에서, 시장과 마트에서, 그리고 정치 관련 행사장 등에서 받는다.

 

그런데 최근 10~20년 사이 상황이 좀 달라졌다. 국민투표에 부쳐지는 안건이 과거보다 늘어나 개별 안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줄었다. 정치 이슈에 대한 토론의 장은 온라인으로 옮겨갔다. 예전처럼 열심히 발로 뛰어 오프라인 서명 10만 건을 모으기도 어려워졌다. 이를 틈타 몇 년 전부터 새로운 산업이 생겨났다. 돈을 받고 전문적으로 시민들의 서명을 받아 위원회에 전달해주는 일종의 서명 수집 대행사이다. 2000년대 이후 생겨난 대행사가 12개쯤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행 산업 초기에는 서명이 건당 2스위스프랑(약 3000원)쯤에 거래됐는데, 최근에는 값이 최대 네 배쯤 올랐다. 단순 계산으로 8스위스프랑짜리 서명을 10만 개 ‘구입’하려면 80만 스위스프랑(약 12억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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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알려진 계기는 대행사 중 하나가 비용 청구서를 위원회가 아닌 엉뚱한 주소로 보내는 실수를 하면서 서명 가격이 새어나가 언론에 보도됐기 때문이다. 서명을 판매하는 대행사의 역할은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스위스인들의 자부심에 찬물을 끼얹었다. 한 신문 기사 제목처럼 “거래된 민주주의(Die gekaufte Demokratie)(〈타게스 안차이거〉, 2024년 9월8일)”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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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서명 거래 자체가 아니라, 대행사들이 모은 서명 중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점이다. 이 사실이 알려진 과정을 살펴보자. 36세 여성 노에미 로텐은 2023년 ‘시민복무제’ 국민제안을 구상했다. 남성 대상의 현 군복무제를 남녀 모두의 공공부문 복무제로 바꾸자는 내용이다. 발안자 로텐은 서명 수집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대행사 인콥(Incop)에 일을 맡긴다. 인콥 대표인 프랑크 테세모는 한 달 안에 서명 1만 개를 모아주겠다며 건당 4.5스위스프랑(약 7000원)의 가격을 제시했다. 로텐은 테세모가 수집해온 서명을 확인받기 위해 주민센터에 보냈다가 무효 서명이 너무 많다는 답변을 받았다. 사실 10만 건쯤 서명을 받다 보면 서명자의 실수나 알아보기 힘든 필체 등으로 10% 정도는 무효가 된다. 그런데 인콥에서 모은 서명은 지역에 따라 적게는 35%, 많게는 90%까지 무효 처리됐다.

 
 

의심이 든 로텐은 직접 서명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조직적인 사기 패턴이 드러났다. 존재하지 않는 주소들이 쓰였고, 이름과 주소는 맞는데 생년월일이 틀린 경우도 많았다(이름과 주소는 거리 우편함을 보고 베낄 수 있지만 생년월일까지 알아내기는 어렵다). 같은 인물이 여러 번 반복 서명을 했는데 그 필체가 다 다른 경우도 있었다. 로텐은 이 모든 조사 내용을 236쪽짜리 자료로 만들어 연방검찰청에 선거 사기 혐의로 인콥을 고소했다. 그게 2023년 6월14일의 일이다. 스위스에서 선거 사기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해지는 범죄다.

 


로텐의 고소는 시작에 불과했다. 쉬쉬하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기다렸다는 듯 비슷한 정황이 곳곳에서 보고됐다. 〈타게스 안차이거〉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서명 수집 단계가 끝나고 검토를 기다리거나 투표일을 받아둔 국민제안 중 12건 정도가 위조된 서명을 이용한 것으로 의심된다. 이미 투표를 통과해 시행 중인 법안 가운데 위조 서명이 포함된 것들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수조차 없다. 하지만 정부는 당장 서명 수집 대행 업무를 금지할 계획이 없으며 투표를 앞둔 국민제안을 재검토하지도 않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서명 사기극’ 정말 몰랐을까?



정부의 미적지근한 대응은 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 서명 사기극을 정부가 몰랐을까? 수집된 서명은 주민센터와 연방의회사무국에서 확인한다. 모를 수가 없다. 요건을 갖추지 않은 무효 서명의 비율이 급증하는 추세를 정부가 처음 인지한 것이 2019년 즈음이고, 상황이 악화되자 2022년 연방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는 사실이 이제야 알려졌다. 그 점을 왜 국민에게 공개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커지고 있다.

서명 위조 외에 다른 문제도 있다. 인콥 등 대행사 10여 곳 대부분은 스위스 서부인 프랑스어권에 있다. 수집되는 서명도 프랑스어권 주민들 것이 많다. 그러다 보니 묘한 불균형이 생긴다. 스위스는 언어에 따라 독어권, 프랑스어권, 이탈리아권 등으로 나뉘는데, 언어뿐 아니라 정치적 입장과 문화 차이도 크다.

 

예를 들어 지난 수년간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프랑스어권 주민의 반대율이 독어권 주민의 반대율보다 높았다. 그런데 최근 발의된 원자력발전소 추가 건설안(‘스톱 블랙아웃 국민제안’) 지지 서명 중 절반 이상이 프랑스어권에서 나왔다. 서명만 보면 프랑스어권 주민들의 강력한 의지 덕에 발전소 건설안이 투표에 부쳐지게 된 것 같지만, 실은 대행사가 이 지역에 몰려 있어서 그런 것이다.

 

이 경우 서명 개수가 국민 의지를 반영한다고 보기 힘들다. 직접 민주주의를 돕는다는 대행사가 국민 의지를 왜곡하는 셈이다. 투표에 부쳐지지 않았을 안건이 대행사 덕에 투표장까지 가면서 지출되는 예산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석 달에 한 번 열리는 국민투표 당일 행사 비용은 800만 스위스프랑(약 126억원)이다.

 


이번 스캔들의 핵심에 있는 대행사 인콥은 얼마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어반 사이너스(Urban Signers)’라는 이름으로 지부를 세웠다. LA가 위치한 캘리포니아는 주민투표제를 시행하는 주(州) 중 하나다. 어반 사이너스 회사 웹사이트에 따르면 CEO는 인콥의 대표인 프랑크 테세모이고, 스위스에서 진행 중인 여러 국민제안이 고객으로 소개되어 있다.

 

인콥이 모은 위조 서명으로 도마 위에 오른 안건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이 회사의 업적으로 포장된 것이다.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수출된 것은 직접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의(民意) 왜곡술이다. 스위스는 해외로까지 확장된 ‘민주주의의 실패’를 어떻게 극복할까.

취리히·김진경 통신원 editor@sisain.co.kr

https://n.news.naver.com/article/308/0000035590?sid=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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