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은 미국인…재벌 일가 10%는 미국 국적자
한국에서 시가총액 1조 원대의 상장기업을 운영하는 사장이 있다. 미국 출장이 잦기는 하지만 주된 사업장과 거주지는 물론 한국이다. 이 사장은 미국 뉴욕 맨해튼에 고급 아파트를 산 뒤 미국 명문대에 다니는 아들에게 물려줬다. 우리나라 정부에는 부동산 취득 사실을 신고하지 않았고 세금도 내지 않았다.
비결은 미국 영주권에 있었다.
비결은 미국 영주권에 있었다.
이 회사는 미국에도 법인을 갖고 있다. 사장은 한국 뿐만 아니라 미국 법인장으로도 동시에 이름을 올린다. 이를 통해 온 가족이 미국에서 영주권을 취득했고, 현지법인에서 받은 월급으로 아파트를 매입한 것이다. 영주권자가 현지에서 번 돈으로 미국 부동산을 샀으니 국내에 신고할 의무가 없어졌다는 주장이다. 미국은 한 사람이 일생동안 세금 없이 물려줄 수 있는 한도가 높은 나라다. 미국에서도 세금을 면제 받았다.
기가 막힌 '國테크'인 셈이다.
올해 KBS 탐사보도팀은 두 차례에 걸쳐 국내 재벌들의 해외부동산 보유실태를 보도하면서 재벌일가의 상당수가 외국, 특히 미국 국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들의 국적을 면밀히 분석했다.
취재팀은 먼저 국내 10대 재벌일가의 1세대부터 5세대 중 사망자를 제외한 921명을 대상으로 선정했다. 그리고 정부에서 발간하는 관보를 통해 이들의 명단이 있는지 하나하나 확인해 갔다. 관보에는 우리나라 국적을 포기(이탈)하거나 상실한 사람, 국적 회복자가 나오는데 지난 1980년부터 2014년까지로 기간을 한정해 조사했다.
당연히 한국 국적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국 시민권자였다. 고 이병철 회장의 손녀인 CJ 그룹 이미경 부회장, 현대차 정몽구 회장의 셋째 딸인 정윤이 씨,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의 딸인 조현민 씨 등은 한국 국적을 포기한 미국 시민이었다. 롯데그룹의 경우 신동빈 회장의 장남 신유열 씨가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가 다시 상실해 현재 일본 국적인 사실이 확인됐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은 각종 인물정보 서비스에 서울 출생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미국 워싱턴 DC 인근에서 태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삼성그룹은 이 부회장이 어린 시절 미국 시민권을 정리했다고 밝혀와 국적 통계에선 제외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자신의 자녀들도 모두 미국 뉴욕대학병원에서 낳았다. 이 부회장의 동생인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도 자녀 4명 가운데 2명을 미국에서 출산했는데 둘째 딸을 낳았을 때는 제일모직 부장으로 한국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LG그룹 구본무 회장의 장남인 구광모 씨와 큰 딸인 구연경 씨도 자녀를 미국에서 출산했다. 구 회장의 손자와 손녀 4명은 모두 미국시민권자인 셈이다.
취재팀이 조사 대상으로 선정한 921명 가운데 외국 국적자는 115명이었고, 이 가운데 미국 국적자는 95명이었다. 10% 가량이 미국인인 셈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태어나 시민권을 취득한 것으로 확인됐다.
조사대상 921명 가운데 미국 출생자는 119명이었고, 1~2세대는 5명에 불과했지만 3~5세대에 들어서면 114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특히 미성년자 121명 가운데 38명이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출생률이 31%나 됐다.
● 외국인 학교가 뭐기에…불법·편법 백태
전국에는 51곳의 외국인 학교가 있다.
불법·편법 입학이 기승을 부리면서 지난 2009년 입학규정이 바뀌었지만, 그 전까지는 부모가 모두 내국인이라고 해도 학생 본인만 외국 시민권이나 영주권이 있으면 입학이 가능했다. 재벌 일가들은 이런 점을 악용해 외국인 학교에 자녀들을 편법 입학시켜 온 것으로 확인됐다.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자인 정일선 비앤지스틸 사장은 자녀를 외국인 학교에 보내기 위해 부인과 자녀가 지난 2006년 1월 캄보디아 시민권을 취득했다. 당시 부인은 서른 살, 자녀는 7살이었다. 원칙적으로 캄보디아는 현지법상 12억 5천만 리엘, 미화 35만 달러 정도를 투자하면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이들은 우리 정부에 신고하지 않고 비밀스럽게 캄보디아의 국적을 취득했다. 정 사장은 취재팀에게 한국과 캄보디아 복수 국적을 갖고 있다고 밝혀 왔지만, 우리 국적법상 외국 시민권을 취득하면 한국 국적은 자동 상실된다. 정 사장의 부인과 딸은 캄보디아 시민인 셈이다. 정일선 사장은 지난 2012년 검찰 수사 때 외국인 학교 부정입학으로 벌금형을 받은 노현정 전 아나운서의 시아주버니다.
현대종합금속 정몽석 회장은 지난 2002년 두 딸을 외국인학교에 보냈는데 중남미 국가인 에콰도르 영주권으로 입학을 시켰다. 정 회장은 취재팀과의 통화해서 당초 유학을 보내려다 돈을 아끼려고 외국인학교에 입학시켰다고 말했다.
법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다면서도 영주권 취득 경위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했다. 현대종합금속은 매출액 5천억 원 대의 회사다.
LG그룹 구본무 회장의 동생인 구본능 KBO 총재는 아예 아무런 자격도 없이 자녀를 외국인학교에 입학시켰다. 구 회장의 딸은 지난 2009년 외국인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입학 당시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었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싱가포르 영주권을 취득해 1년 뒤인 2010년에 학교 측에 제출했다. 학교 측과 공모해 자녀를 부정입학시킨 것이다. 구 회장 외에 박정원 주식회사 두산 회장도 싱가포르 영주권을 이용해 자녀를 외국인학교에 입학시켰는데, 자신이 두산 상사 사장으로 있던 시절 싱가포르 법인에도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려 영주권을 취득한 것이었다.
그들이 불법과 편법을 마다하며 보내려고 했던 외국인 학교는 전국에 51곳이 있다. 잔디구장을 비롯한 첨단 시설과 외부에 잘 노출되지 않는 폐쇄성, 영어로만 수업을 진행하는 특징 때문에 많은 학부모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다. 하지만 자격이 된다고 하더라도 연간 등록금이 최소 3천만 원 이상 들어가기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못 보내는 게 현실이다. 지난 2003년부터 세금 2천억 원이 외국인 학교에 투입됐다. 외국인 투자유치 명목이다.
지난 2012년 인천지방검찰청은 외국인 학교 부정입학 사건을 수사했다.
당시 국무총리 일가 등 사회지도층과 두산, 현대 등 재벌 일가들이 줄줄이 적발됐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그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학교를 자퇴하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런데 이번 취재 과정에서 상당수의 자녀들은 미국 하와이 등에서 외국인학교 입학에 필요한 해외 체류기간 1,095일을 채운 뒤 다시 국내로 들어와 외국인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번의 단죄로 불법과 편법은 끊어지지 않는다
● 재벌들의 미국 명문대 입학금은 얼마?
총수 일가의 출신 학교도 ‘사생활’이란 이유로 대부분의 기업에선 제대로 답변해 주지 않았다. 결국 10대 재벌 일가 921명 가운데 41%인 380명의 출신 학교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380명 가운데 미국으로 대학이나 대학원을 간 재벌일가는 264명이었다. 무려 70%다.
3,4 세대 이후로 내려오면서는 ‘보딩 스쿨(Boarding School)’이라 불리는 미국의 기숙형 사립학교로 진학하는 경우도 상당수였다. 요즘엔 ‘주니어 보딩스쿨’이라는 사립 중학교로 일찌감치 아이들을 보내는 재벌가도 늘어나고 있다. 미국 보딩스쿨은 한 해 학비만 4천만 원이 넘고, 기숙사비까지 합치면 교육비가 최소 6천만 원으로 늘어난다. 과외 활동까지 병행하면 연간 1억 원은 우습게 들어가지만, 한국 재벌 자제들은 30년 전부터 보딩스쿨에 진학해 왔다.
특정대학에 대를 이어 입학하는 기업들이 눈에 띄었다.
SK는 고 최종현 회장을 시작으로 아들인 최태원 회장, 손녀인 최윤정 씨까지 3대를 이어 시카고대학을 나왔다. GS그룹 허창수 회장과 아들인 허윤홍 상무는 세인트루이스 대학 출신이다. 한진그룹은 조양호 회장과 조 회장의 3남매인 조현아. 조원태 부사장, 조현민 씨를 비롯해 모두 8명이 서던캘리포니아 대학 동문이고 두산그룹의 경우 박용성 회장을 비롯해, 3세대인 박지원, 박석원, 박진원 씨 등 모두 15명이 뉴욕대 출신이다.
우리나라에선 부모가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자녀의 입학까지 보장되진 않는다. 대학수학능력 시험 성적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입학사정관제로 학생을 선발하는 미국 대학은 ‘레거시(Legacy)’라 불리는 ‘동문 기여 입학제도’를 허용한다. 가족 중에 동문이 있으면 입학할 때 가산점을 주는 제도로 특히 그 가족이 학교에 얼마나 기부했느냐를 본다.
우리 입시제도에서 금지돼 있는 ‘기부금 입학’과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를까? 미국에서 만난 한 유학원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자녀를 입학하는 조건으로 한 번에 거액을 내면 기부금이죠, 기여 입학은 지속적으로 대학과 관계를 맺고 적은 금액이라도 꾸준히 내는 것, 그리고 그 집안의 배경이 학교에 도움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불법도 아닌데, 각 기업들은 ‘기여입학’ 여부를 묻는 질문에 하나같이 아니라고 답했다. 물론 아무리 기여입학이라고 하더라도 성적이 평균에서 한참 미달인 학생을 입학시키지는 않는다. 같은 레벨일 때 좀 더 가산점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취재팀이 만난 전 미국 대학 입학처 직원은 성적이 한참 못 미치는 자녀도 더러 입학을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녀를 미국 명문대학에 보낸 재벌 일가는 대학에 얼마를 기부했을까?
현지에서 들리는 소문은 무성했다. 하버드, 예일 등 미국 명문대에 자녀를 보내기 위해 수십 억 원 단위부터 환치기를 통해 백억 원을 줬단 이야기까지...
아쉽게도 그런 거액의 실체는 확인하지 못했다. 규정 상 개인의 기부 내역은 밝힐 수 없다는 게 미국 대학의 공식 입장이었다. 기부자의 이름을 건물에도 새기는 미국인과는 달리 한국인들은 기부를 하면서도 기부 내역을 공개하길 꺼려한다고 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걸까? 대신 재벌 일가가 운영하는 기업들이 낸 기부 내역은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두산그룹은 박진원 사장이 전무로 있던 2008년부터 두산인프라코어를 통해 해마다 5만 달러씩을 뉴욕대에 기부하고 있다. 박 사장은 2009년부터 뉴욕대 총장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은 지난 2007년 선대회장의 이름을 딴 ‘조중훈 석좌교수직’을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에 기부했다. 당시 이 석좌교수직엔 대한한공에 항공기를 판매하는 미국 보잉사가 백만 달러를 보탰다. 총수 일가의 모교에 회사가 나서 기부를 한 것에 대해 각 기업은 ‘사회공헌’ 차원에서라고 말했다.
“교육 한류를 위해 사장의 모교에 기부했다”는 독특한 답변을 한 기업도 있었다. 효성그룹이다. 효성 조현준 사장은 2008년부터 세인트폴 학교 이사를 맡고 있는데, 이때부터 효성그룹은 세인트 폴에 해마다 20만 달러씩, 모두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글로벌 리더’가 되기 위해 미국 명문학교로 유학 가는 건 재벌가의 일반적인 교육 코스가 돼버렸다. 사업 인맥을 확보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재벌 일가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가 나타났다. 몇 년 전부터 중국의 부호들이 각 대학과 보딩스쿨에 막강한 기부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점점 한국 부유층 학생들의 설 자리는 줄어들고 있다고 하니, 재벌가의 시름이 하나 더 늘어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 재벌도 한국인도 아닌…당신의 나라는 어디입니까?
“왜 병역을 앞두고 국적을 포기하셨습니까?”
10대, 20대에 국적을 포기한 재벌가 남성들에게 취재팀이 던진 질문이다.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의 것들이었다. 병역 기피가 아니라거나 사생활에 왜 간섭하느냐는 항변을 예상했지만 “나는 재벌이 아닌데 왜 취재하시죠?”라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기업의 후계자, 적어도 회장님의 아들이 아니면 재벌가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한국인이 아닌데 왜 병역에 대해 물어보냐”는 반응도 있었다. 이미 국적을 포기했으면 병역에 대해 대답할 의무가 없다는 논리였다. 재벌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이번 프로그램 취재 과정에 가장 많이 만난 이른바 ‘경계인’들이다.
일반인들에게도 이름 석 자가 낯설지 않은 LG가 3세, 구본호 씨. 지난 2006년 무렵 국내 증시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떠올랐던 구 씨는 2년 만에 주가조작 사건에 연루돼 검찰 수사를 받았다. 주가조작은 무죄로 결론 내려지긴 했지만 구 씨는 배임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이밖에도 구 씨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신문 경제면에 오르내렸다. 대주주로 있는 비상장 물류업체, 범한판토스가 ‘배당 잔치’를 벌였기 때문이다. 범한판토스는 LG 계열사 물량이 매출의 절반 이상인 일감 몰아주기 기업이다. 구 씨가 지난 1999년 대주주가 된 이후 받아간 배당금은 8백억 원에 달한다.
이런 구본호 씨가 2년 전 조세심판을 청구했다. 개인 주식을 범한판토스에 팔고 거둔 차익에 대해 양도세 20여억 원을 냈는데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라는 게 이유였다. 구본호 씨는 25살 때인 지난 2000년 미국으로 귀화한 미국 시민권자다. 국세청은 구 씨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것은 병역을 기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고 수시로 국내를 드나들고 있다고 맞섰다. 구 씨의 재산 대부분이 국내에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구 씨의 승리였다. 소득세법 시행령 규정에 납세 의무자는 ‘최근 5년 간 1년의 절반 이상을 국내에 체류한 사람’이라고 돼있는데 구 씨의 경우 5년 중 2년은 국내 체류 일수가 절반에 못 미친다는 것이 이유였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누나의 아들, 이 모 씨 형제. 두 사람은 미국에서 태어나 복수 국적을 취득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뒤 미국으로 건너가 만 36살이 될 때까지 관광 비자로 한국을 드나들며 살았다. 이 씨 형제는 고령으로 병역이 면제되던 해에 귀국해 나란히 동일석유, 한익스프레스 대주주와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동일석유는 43개 주유소와 충전소를 포함해 2천억 원대 부동산 자산을 보유한 알짜 회사다. 김승연 회장은 이 회사 주식을 누나 가족에게 헐값에 넘긴 혐의로 처벌받기도 했다. 한익스프레스는 한화그룹 물량이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물류회사다. 이 씨 형제에게 취재팀은 “고령이 될 때까지 외국에 머물면서 병역을 기피한 게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돌아온 대답은 “미국인인데 병역 의무가 없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나는 재벌이 아닌데 왜 취재 대상에 포함됐냐”는 반응도 어김없이 따라왔다.
재벌이 아니라지만 재벌의 후광 속에 살아가는 이들. 한국인이 아니라지만 한국에서 1년에 수십억 원의 배당금을 받아 살아가는 이들. 미국과 한국 경계 지대에 살며 권리와 의무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회색인들. 이번 프로그램의 제목은 이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당신의 나라는 도대체 어디입니까.
● P.I가 뭐기에? 대한민국 홍보맨 분투기
P.I, 즉 President Identity란 최고경영자 이미지 마케팅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처럼 최고경영자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활용해 회사 인지도를 높이는 마케팅 기법이다. 그렇다면 한국 재벌 기업에서 P.I는 어떤 의미일까. 회사를 이용해 최고경영자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것을 뜻한다.
‘회장님의 나라는 어디입니까?’ 방송을 20여 일 앞둔 지난 9월 12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조찬 회의가 열렸다. 광고주협회가 소집한 대기업 홍보담당자 대책 회의였다.
주요 안건은 KBS 탐사보도팀이 준비 중인 반재벌 정서 프로그램에 대한 대응 방안이었다. 회의에는 변호사가 배석했고 각 기업에는 ‘KBS 취재진으로부터 욕설을 들은 적이 있는가’라는 등의 황당한 질문을 담은 설문지가 배포됐다. 하지만 논의 결과 취재 대상이 대부분 ‘공인’이기 때문에 법적 대응은 힘들다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전해 들었다. 대신 재벌 총수가 아닌 ‘자연인’ 신분의 재벌 일가를 내세우면 법적 대응이 가능할 것 같다는 일종의 ‘팁’도 오갔다고 한다.
해외부동산 추적보고서 1,2,3편을 제작하면서 어느 정도의 반발은 예상했다. 불특정 다수의 재벌을 대상으로 검증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광고주협회와 일부 기업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광고를 빼겠다는 으름장 정도는 애교였다.
요구 사항은 한 가지였다.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반론도 필요 없다, 우리 회장님 이름은 빼달라는 것이었다. 모 기업이 광고를 모두 해지할 경우, 모 기업이 사업 계약을 해지할 경우, 손해액이 수십억 원에 이른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만약 KBS가 수신료 없이 광고 수입에만 의존하는 언론사였다면 과연 방송이 가능했을까. 누구도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일부 기업의 고압적인 자세에도 취재팀은 마냥 분노할 수만은 없었다.
일선을 뛰는 이른바 ‘홍보맨’들의 절박함 때문이었다. ‘밤샘 편집하느라 힘드시죠? 회사 로비에 통닭 가져다 놨습니다.’ 밤 11시에 날아온 문자 메시지는 회장님 일가의 이름을 빼달라는 읍소였다. 주말에도 정처 없이 KBS 앞을 서성이는 홍보맨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반추하는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날리는 홍보맨도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셔야 되냐”고 묻자 한 홍보맨은 답했다. “재벌들이 그렇습니다. 단 한 자라도 본인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이 나가는 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서 취재진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저 목 날아갑니다”라는 호소였다.
취재팀은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만드는 프로그램이 이 정도로 엄중한 내용인가?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해마다 인사 청문회 때면 고위 공직자 후보들을 대상으로 늘 해오던 취재였다. 대상이 재벌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그 답은 한국의 기업 환경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창업 세대에서 2세대를 거쳐 빠른 곳은 이제 3세대까지 내려왔지만 한국의 재벌 기업에서는 아직도 ‘오너’가 절대 가치인 것이다.
프로그램 취재 과정에 딱 한 곳의 기업에서 조금은 다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회사 홍보팀은 P.I는 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사안이니 회장님께 직접 질의하십시오.”라는 응답이었다. 질문을 받지 않겠다니 난감한 노릇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신선하기도 했다. 그래서 선선히 회장 비서실과 자택으로 질의서를 우편 발송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회장님의 답변을 들고 온 건, 결국 홍보팀이었다.
국내 10대 재벌일가의 국적 현황과 문제점을 다룬 '회장님의 나라는 어디입니까?'는 오늘(7일)밤 10시 KBS 1TV [시사기획 창]에서 방송된다.
국내 10대 재벌일가의 국적 현황과 문제점을 다룬 '회장님의 나라는 어디입니까?'는 오늘(7일)밤 10시 KBS 1TV [시사기획 창]에서 방송된다.
https://news.kbs.co.kr/news/mobile/view/view.do?ncd=2943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