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가 아니라 열여섯 문재학… 5월을 지켜낸 이름입니다 (소년이 온다 동호)
“혼자 어찌 가겄어요”… 열흘 만에 ‘관 번호 94’로 돌아온 재학이
문재학 (1964년 6월~1980년 5월)
어려서부터 그랬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 생활이 어려워지자 재학이는 상업고등학교에 가겠다고 자청했다. 어머니 김길자(80)씨가 “누나도 인문계 갔는데, 너는 왜 상고 갈라 그라냐” 묻자 “공부 잘해 은행 취직하면 아부지 돈 찾기 쉽지 않것어요”라고 답하던 아들이었다. 재학이는 3남매 중 막내였다. 애교도 많았다. 세 사람 누우면 꽉 차는 좁은 다락방에서 막내 재학이는 꼭 엄마와 아빠 사이의 품을 파고들었다. 아들의 온기는 따듯했다.
“엄마, 창근이가 죽어갖고 드러누워 있어요. 관에 담아지지도 않고 그라는디, 어찌 놔두고 가겄어요.”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전남도청 재수복 작전)이 시행되기 이틀 전인 25일 도청에서 시신을 수습하던 재학이, 엄마에게 한 말이다. 재학은 전날부터 도청에서 시신 수습하고 유족 안내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 시위 도중 총에 맞아 사망한 초등학교 동창 양창근(16·숭일고1)군을 본 것이다. 김씨는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내 자식만 살리자고 재학이를 데리고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창근이 시신만 수습하고 집에 오겠다는 아들을 김씨는 믿었다.
다음날에도 아들은 집에 오지 않았다. 김씨는 남편과 함께 도청에 갔다. 본관에 들어서자 재학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1층으로 내려왔다. 집에 가자고 사정했지만 아들은 통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설득에 실패하고 재학이를 두고 집에 왔다. 그날 통금 시간인 오후 7시 재학은 집에 전화를 걸었다. 차가 끊겨 못 온다는 말에 김씨는 맥이 풀렸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담긴 재학이
27일 새벽 3시쯤 됐을까. 도청에서 나는 총소리는 꼭 번개 같았다. 김씨는 발만 동동 굴렀다. 그래도 학생은 항복하면 살려준다는 말을 믿고 살아 있을 거란 작은 희망만은 버리지 않았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김씨는 남편과 함께 도청으로 갔다. 새벽 6시쯤 도착했는데, 시민군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물청소까지 하고 난 뒤였다.
열흘 동안 아들을 찾아다녔다. 6월 6일 재학이 학교 담임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남일보에 사망자 명단이 실렸는데, 재학이가 있다는 것이다. 계엄사 4-3, 묘지번호 104, 관 번호 94. 국가는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시신을 망월동에 묻었다. 재학의 이야기는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담겼다. 친구 정대의 시신을 수습하겠다며 도청에 남은 주인공 동호가 재학이다.
오월이 되면 김씨는 아들이 사무치게 보고 싶다. 자식 죽은 것도 서럽고, ‘빨갱이’로 낙인찍혀 사람 대접 못 받은 세월도 분하다. 지금은 크게 바라는 것 없다. 아들 재학의 죽음이, 5·18의 역사가 잊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가 무식해서 무슨 할 말이 있당가요. 재학이 같은 선배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갔다는 걸 꼭 기억해 줬으면 좋겠지요. 그거면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