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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와의 인터뷰 질의서는 9월 29일 발송됐으며, 첫 번째 답변은 일주일 뒤인 6일 이메일로 도착했다. 추가 질의서를 보내고 10일 오전 두 번째 이메일이 도착했다. 메일을 열어본 뒤 약 10시간이 지나 한강의 이름은 노벨 문학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호명됐다. 한강이 보내온 인터뷰 답변을 한강 작가의 목소리 그대로 전한다.
―지금 선생님이 위치하신 장소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창문 바깥의 풍경엔 어떤 사람들이 지나가고 탁자엔 어떤 사물이 있는지, 또 어떤 책이 펼쳐져 있는지.
▷지금은 일요일 새벽(6일)이라 창밖에 아무도 지나가지 않고 고요합니다. 최근까지 조해진 작가의 '빛과 멜로디', 김애란 작가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었고 지금은 유디트 샬란스키의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과 장 자크 루소의 '루소의 식물학 강의'를 번갈아 읽고 있습니다. 사이사이 문예지들도 손 가는 대로 읽고요. 저는 쓰는 사람이기 전에 읽는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고단한 날에도 한 문단이라도 읽고 잠들어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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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의 소설을 결국 관통하는 주제는 '기억과 상처'일까요. 한때 '몽고반점'이 탐미주의 소설로 오독되기도 했는데 당시의 인물들과 최근작의 인물들은 사실 서로 '기억과 상처'라는 심리적인 그물로 연결돼 있습니다. '상처를 복원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꿰어 독자들과 공유하는 것, 그렇게 집필된 소설을 독자가 읽는 것'은 어떤 힘을 가질까요. 결국 소설의 쓸모와 효용에 관한 질문이 되었는데, 이에 대한 견해를 여쭙고자 합니다.
▷저는 언제나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그리고 산다는 게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자꾸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고민을 매번 다른 방식의 소설들로 다루고 싶어했고요. 제 소설들을 읽어주신 분들과 그 암중모색을 나눌 수 있었던 것에 작은 의미가 있었기를 빕니다. 요즈음의 저는 생명 자체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품고 솟아나는 것들에 관심이 생깁니다. 다음 소설에서는 그런 생명의 감각을 다뤄보고 싶습니다.
―2016년 부커상 수상 즈음 인터뷰에서 "인간이란 주제는 제가 지금까지 소설을 쓴 동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에 대한 질문을 소설이란 형식으로 '거는' 것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선생님의 과거 말씀(작가의 말 등)을 되짚어보면 작가가 소설을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 작가를 잉태하는 것이란 생각도 드는데요.
▷생각하고 서성이고 고민하고 질문하고 길을 잃고 우회하고 되돌아오고…. 그런 일이 소설을 쓰는 일이라고 지금도 느낍니다. 그렇게 질문들을 다루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라고요.
―애써 희망하시는 일도 아니고, 또 답변하시기도 꺼려지시겠지만 엄연히 다가올 미래라고 생각하여 조심스럽게 질문 드립니다. 저는 10년 안에 '소설가 한강'의 이름이 스웨덴에서 호명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10일 노벨 문학상 수상). 이미 유럽은 한강의 이름을 연거푸 외치고 있고요. 한 나라의 문학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 다른 나라에서 읽히고 너른 공감을 얻는 것은 작가와 독자, 즉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형성한다고 보십니까.
▷문학이라는 것이 원래 연결의 힘을 가지고 있지요. 언어는 우리를 잇는 실이기도 하고요. 어디에든 읽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이 그 독자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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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다음 소설의 주제로 '생명의 감각'을 언급하셨습니다. 현재 집필 중인 다음 소설에 대해 귀띔이 가능할까요.
▷원래는 여름까지 마무리하려고 했던 소설이 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뤄졌습니다. 가을이 아직 남았으니 가을 안에 완성해보고 싶지만, 아마도 겨울로 넘어가게 될 것 같습니다. 소설을 끝내는 시점을 스스로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대체로 늘 틀리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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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한 기자도 등단한 시인이래
원 인터뷰 훨씬 길고 질문도 답변도 너무 품위있고 좋아
노벨문학상 언젠가는 받으실거 같아요 하고 질문했는데 10시간 후 노벨문학상 받은 작가님 ㅋㅋㅋ 기자 거의 신내린 수준의 인터뷰 타이밍과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