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소년의 팔을 놓지 않은 채 김진수는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적당한 때 너는 항복해라.
알겠지, 항복하라고. 손들고 나가.
손들고 나가는 애를 죽이진 않을 거야.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는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너무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 피를 그냥 덮으란 말입니까. 먼저 가신 혼들이 우릴 지켜보고 있습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엄마, 저 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 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소년이 온다 - 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