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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여자는 스물여섯 넘으면 결혼하는 게 정상’이라는 사법부의 공식(?) 선언은 대한민국 주부들을 허탈과 충격으로 몰아넣은 판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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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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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간통에만 죄를 물었던 법률도

 

 

1905년 4월 20일 대한제국 법률 제3호로 공포된 형법대전(刑法大全)에는 이런 규정이 있다. “유부녀가 간통한 경우 그와 및 상간자를 6개월 이상 2년 이하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동법 제265조) 즉 간통의 책임을 유부녀’에게만 지우고 바람이 나든, 첩을 들이든 남자에게는 사법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된 대한민국의 법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한국 정치사의 여걸 박순천(여성운동가. 정치인. 제2,3,4,5,6,7대 국회의원)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19명 중의 여성 중의 하나였다.

 

 

국회에서 발언 중인 박순천 전의원

▲ 국회에서 발언 중인 박순천 전의원(이미지 출처 : 부산일보 데이터베이스)

 

 

그가 이끌던 대한여성회는 간통죄 쌍벌제 즉 간통남도 처벌하도록 법을 개정하자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박순천은 낙선하고 말았다. 해당 지역구의 여성 표를 잃었기 때문이다. 박순천의 지역구는 종로구였고 당시 종로에는 국내 최고의 홍등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부유한 남자들이 두 집 살림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던 시절, 간통죄 쌍벌제가 적용되면 피해를 볼 것을 우려한 홍등가 여성들이 박순천을 보이콧해 버린 것이다. 거기에 “여자만 처벌해야 한다. 여자는 남자와 생리적으로 다르고, 심리적으로 다르며, 또한 남자의 성욕과 다르다. ”(대법관 최병주)거나 “우리 헌법 정신도 조상이 남겨준 피의 순결을 고수해 나가는 데 대해서는 조금도 위반됨이 없으리라 믿는다. 부녀층에 대해서는 좀 미안하지만 여자만 처벌하자. ”(국회의원 방만수)는 남자들까지 가세하고 보니 간통죄 쌍벌제의 길은 난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줄기차게 간통죄 쌍벌제를 외치던 사람들의 압력으로 이 법안은 1953년 7월 국회에 상정된다. 투표 결과는 아슬아슬했다. 당시 국회의원 재적의원수 110명의 과반수에서 한 표가 많은 57표로 통과된 것이다.

 

 

국회의 간통쌍벌죄 통과를 전했던 언론기사 

▲ 국회의 간통죄 쌍벌제 통과를 전했던 언론기사(이미지 출처 : 경향신문 1953년 7월 5일)

 

 

우여곡절이야 어찌 되었든 새로운 법이 발동됐고 한국 사회는 그에 따라 변화해 갔다. 바로 다음 해인 1954년 어느 주부가 첩을 들인 남편을 간통죄로 고소하면서 새 역사(?)를 쓴 것이다. 기절초풍한 남편이 위자료를 줄 테니 고소를 취하하라고 하자 아내는 이렇게 대답한다. “사회 정화를 위해 고소 취하는 못하겠다. ” 이미 그녀는 법의 날개를 달고 있었다. 가부장제가 굳건하던 시절, 간통죄 쌍벌제 도입은 바닥 수준이었던 여성 인권의 최후의 보루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물론 시대가 바뀌고 사회적 분위기가 변화하면서 간통죄는 또 다른 의미의 억압이 됐고 2016년 마침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말이다.

 

 

위헌 의견 7명 성에 관한 국민의 의식이 변화하고 성적 자기 결정권을 중시 해당 조항은 성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

▲ 헌법재판소의 간통죄 위헌 판결 뉴스 (이미지 출처 : 연합뉴스TV 2015년 2월 26일)

 

 

사법부의 공식(?) 선언 “한국의 여성 정년은 스물여섯”

 

 

1985년 4월 서울민사지법합의 15부(재판장 유태현 부장판사)는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될 판결을 내린다. 교통사고를 당한 스물세 살의 회사원 이경숙이 택시 회사를 상대로 낸 피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 결혼 연령인 26세부터는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라고 판결한 것이다. “미혼여성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26세에 달하면 결혼하고 퇴직한다고 보아야 하며...... 26세부터 55세까지는 (회사 임금이 아니라) 일반도시 일용노동에 종사하는 성인 여성의 평균 임금으로 계산해서 손해배상 액수를 산출”한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스물여섯 넘으면 결혼하는 게 정상’이라는 사법부의 공식(?) 선언은 대한민국 주부들을 허탈과 충격으로 몰아넣은 판결이기도 했다. 가사 노동 임금 기준을 ‘일당 4천원’으로 산정했기 때문이다. 여성단체들이 들고 일어났고 항의도 빗발쳤지만 이경숙 본인은 더 이상 소송을 끌고 갈 여력이 없었다. 그때 한 변호사가 혜성과 같이 나타난다. ‘신문을 보고’ 연락을 하는 것이라 했다. “제가 변론을 해 드리겠습니다. ” 하지만 이경숙은 망설였다. 지긋지긋하게 불러대고 물어대고 따져대는 법정 투쟁을 계속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변호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무료로 변론해 드릴께요. 한 번 가 보십시다 에?” 이경숙 본인도 황당했을 것이다. 대체 이 사람은 무엇이며 신문 몇 줄 보고 와서 왜 나한테 이런 식으로 들이대는 것인가? 그러나 변호사의 열정은 그 의문을 덮을 만큼 대단했다. 온갖 설득으로 원고의 마음을 돌려 놓았고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최종 변론같이 기나긴 ‘의견서’를 작성해 재판부의 기를 질리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조영래 변호사

▲ 조영래 변호사(이미지 출처 : 네이버)

 

 

“사실 우리나라 주부들의 가사노동 대가를 금전으로 환산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을 하필이면 ‘최하위 생계노동’인 도시 여성의 날품삯 4천원으로 삼은 것은 정당하게 평가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헌법에 보장된 권리가 사법부에 의해 인정되지 않고 확인되지 않는다면 여성들이 기댈 언덕은 없는 것이지요! ” 

이 변호사의 이름은 조영래. <전태일 평전>의 저자이며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인숙의 변호인으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활약을 펼쳤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무료 변론을 자처한 조영래 변호사와 여성 단체들의 응원 속에 이경숙은 소송을 재개했고 1986년 3월 4일 고등법원으로부터 원고 승소 판결을 받아낸다.

 

 

이경숙씨 사건승소 지난 3월 4일에 있었던 고등법원 항소심에서 이경숙씨가 승리했다. 83년 교통사고로 인한 심한 후유증으로 도저히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된 이경숙씨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대해 25 결혼퇴직제를 적용시킨 1심 판결을 부당하다고 파기, 55세까지 일하는 것으로 보아 피고 자동차보험에 대해 99만 321원을 더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 이경숙씨의 사건승소 판결 관련 문서(이미지 출처 : 한국여성단체연합)

 

 

그 황망한 싸움을 통해 판례로 남은 ‘25세 정년’의 벽을 무너뜨린 이경숙은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여성 55세 정년은 인정됐지만 (법원은) 연 400%의 상여금과 계속 근무 시의 임금 인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여성 정년 문제는 관철됐으나 노동자로서의 피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위해 대법원에 상고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고인 물처럼 고인 법도 썩기 마련

 

 

 

법(法)

▲ 법(이미지 출처 : koreanwikiproject)

 

 

대개 법은 그 시대의 한계선이다. 이 이상은 뚫고 올라갈 수 없다고, 또는 내려갈 수 없다고 그어 놓은 금이고, 넘치는 또는 모자라는 물을 일단 보관하는 둑이다. 그러나 고인 물이 썩듯 고인 법도 썩는다. 법(法)이라는 단어 자체가 물(水)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去) 규칙이 있다는 뜻을 가진 것처럼, 법은 때가 되면 물처럼 흘러야 한다. 또 흐르는 물이 새로운 물길을 내고 주변을 기름지게 하듯 법이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사회가 법을 만들지만 법이 새로운 사회를 앞당기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더하여 기억할 것은 그 물꼬를 틔우는 것은 판사나 변호사,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기도 하지만 여자는 나이 스물 다섯이 정년이라는 ‘법’에 저항하고 여성의 권리 뿐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도 되찾겠다고 나섰던 이경숙씨 같은 보통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시민이기도 하다는 사실이겠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기 전에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 김형민
​​​​​​방송피디.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부산에서 자랐다.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후 방송 제작 일을 해오고 있다. 인터넷에서 ‘산하’라는 필명으로 역사에 대한 다양한 글을 써오고 있다. 《썸데이서울》을 필두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접속 1990》,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양심을 지킨 사람들》, 《한국사를 지켜라》(전2권),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전2권) 등의 책을 냈다. 주간지 《시사IN》에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를 4년째 연재 중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cid=236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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