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기사/뉴스 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56,061 275
2024.09.30 09:22
56,061 275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준비도 안 된 큰 규모의 의대 정원 증원을 갑작스레 발표한 윤석열 대통령의 결정이 의사단체 말대로 충분한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해도, 또한 국민 건강보다는 대형 병원, 민간 보험회사, 의료 산업계의 귓가 송사에 호응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불법이 아닌 한, 정권과 싸워 이기긴 쉽지 않은 것이었다. 더욱이 의료 현장에선 이미 ‘소아과 오픈런’, ‘응급실 뺑뺑이’라는 의사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의사단체조차 이 ‘의사 부족 현상’을 해결할 대안을 내놓지 못했기에 국민 다수는 의대 정원 증원에 찬성했다. 국민까지 이렇게 생각하면 이 싸움에서 이기기란 불가능하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 아리셀 화재 참사 등으로 억울한 수많은 이들이 몇 개월, 몇 년째 폭염과 혹한 속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농성해도 정부의 한 줄 답변이나 신문사의 일단 기사도 얻지 못하는 데 비하면, 의료대란이 이렇게 오래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의사 집단의 힘이 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설령 갑작스레 정부가 결정을 번복해도 마찬가지다.

이 패배에는 몇 가지 결정적인 순간과 이유가 있다. 첫째, 전공의들의 사직 공백이 너무 길어져 비극이 발생한 순간이다. 받아주는 응급실이 없어 죽은 어린 환자와 청천벽력 같은 암 진단을 받고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환자의 고통을 생각해 보라. 제도 탓, 선배 탓이 있고, 전공의 나름대로 할 말이 있겠지만, 죽어가는 환자 곁을 떠난 의사를 죄 없다고 할 수 없다.

둘째, 소수의 극단적 의사가 만들어낸 잘못된 서사다. 이들은 한국 의료의 문제들이 ‘전적으로’ 정부 책임이며 의사는 피해자일 뿐이라는 ‘피해자 의식’, 자료의 ‘자기 편의적 왜곡’,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완결이 어려운 부분을 ‘특정 정권’, ‘노동조합’, ‘좌파’ 탓으로 돌리는 자기 완결적 서사를 만들었다. 이 중 ‘피해자 의식’은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행위조차 정당화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문제는 이 서사가 폐쇄적인 의료계 내에서는 마치 진실인 양 확대 재생산되어 의료계 다수의 신념으로 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잘못된 서사는 의사들을 추동하기에는 요긴했지만, 정부와의 타협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이번처럼 정책 결정에서 배제되거나 싸움에서 질 빌미를 제공했다.

셋째, 환자나 시민들을 “견민”, “개돼지”, “조센징” 등으로 부르며 조롱하거나, “(환자들이) 응급실을 돌다 죽어도 아무 감흥이 없다”, “더 죽어서 뉴스에 나왔으면 하는 마음뿐”이라는 등 패륜적 글을 올리고, 다수의 동료 선후배 의사들이 이 같은 발언을 제지 못 한 것이다. 의협 회장이 판사에게 “이 여자 제정신인가”라고 막말하고, 부회장이 “장기 말 주제에, 건방진 것들” 같은 저질 발언을 하는 순간, 의사들은 졌다.

며칠 전, 진료 의사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공개한 의사가 윗옷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 채 구속 심사를 받으러 들어가는 모습이 신문에 실렸다. 의대 교수로 그 모습을 보는 심사는 복잡하지만, 자기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싫다면, 환자를 돌보는 의사들을 공격하기 위해 그들 이름을 공개하는 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의료계 집단행동 불참 의사와 의대생 명단을 소셜미디어 등에 게시한 사직 전공의가 지난 9월20일 영장실질심사 후 서울중앙지법에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의료계 집단행동 불참 의사와 의대생 명단을 소셜미디어 등에 게시한 사직 전공의가 지난 9월20일 영장실질심사 후 서울중앙지법에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엔 의사가 졌지만, 의료 분야 대혼란은 이제 시작이다. 초고속 고령화와 함께 3~4년 후부터 국민건강보험 재정이 적자로 돌아서면, 의사 증원보다 더 큰 파도인 지불방식 개편, 병의원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 등 더 강력한 정책이 줄을 이을 것이다. 더욱이 지금 추세로 민간 보험의 힘이 계속 커지면, 의사들은 정부보다 훨씬 혹독한 대자본과 시장에 의해 더 심하게 갈가리 나뉘고 시달리는 혼란을 겪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싸우면 백전백패다.

의사가 이겨야 할 때도 있다. 가난하고 오지에 산다는 것이 의사를 만날 수 없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의사들, 이번 추석 연휴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환자를 돌보느라 딱딱한 침대에서 쪼그리고 쪽잠을 청하거나 왕진가방을 들고 길을 나선 의사들은 이겨야 한다. 이 의사들이 이기기 위해선 이번 사태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방법은 극단 세력에 휘둘리지 말고, 합리적인 대안을 가지고, 국민의 지지를 얻는 것이다. 이 방법밖에 없다.

나는 30년 의료정책을 전공한 의사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환자의 행복과 의사의 행복은 하나만 있으면 틀리고, 둘이 함께할 때만 정답이라고 믿는다. 얼마 전 올림픽이 끝났다. 살아생전에 의사들이 시상대에 오르고, 국민이 환호하는 장면을 볼 수 있을까? 여하튼 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709202?ntype=RANKING

목록 스크랩 (1)
댓글 275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드라마이벤트] 임지연X추영우 희대의 조선 사기극! JTBC 드라마 <옥씨부인전> 사전 시사회 초대 이벤트 59 11.16 34,731
공지 ▀▄▀▄▀【필독】 비밀번호 변경 권장 공지 ▀▄▀▄▀ 04.09 3,643,051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7,445,924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핫게 중계 공지 주의] 20.04.29 25,646,221
공지 ◤성별 관련 공지◢ [언금단어 사용 시 📢무📢통📢보📢차📢단📢] 16.05.21 27,037,373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54 21.08.23 5,261,793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31 20.09.29 4,241,793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454 20.05.17 4,821,701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3982 20.04.30 5,294,587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0,041,770
모든 공지 확인하기()
2554943 유머 포켓몬스터 골드/실버 25주년 굿즈 리스트.jpg 1 05:59 115
2554942 유머 일본에서 논란이였던 사마귀 사진 16 05:49 709
2554941 이슈 만화 환상게임 속 사방신 칠성사 얼굴마담들.jpg 5 05:43 490
2554940 유머 새벽에 보면 완전 추워지는 괴담 및 소름돋는 썰 모음 55편 05:38 124
2554939 이슈 시대가 바뀌면서 조금씩 재평가된 만화 주인공 17 05:13 1,875
2554938 이슈 연출 좋다고 말많았던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 연출짤들...GIF 15 04:50 1,398
2554937 이슈 뭘 먹어야 건강에 좋은지 알 수 없는 이유 ㄷㄷㄷ 14 04:38 2,485
2554936 이슈 ⭐️인기걸의 필수조건 우아하게 손수건 줍기⭐️ 7 03:55 1,714
2554935 이슈 아리아나 그란데: what is 키빼몸 ssibal??;; 18 03:44 3,596
2554934 이슈 지난 주말 사전점검 후 앞으로 송도에서 ‘뷰’ 좋은걸로 손꼽힐듯한 아파트 03:42 2,477
2554933 이슈 아이폰이 너무 무섭습니다. (갑자기 혼자 소리가 재생되는 현상) 44 03:33 3,644
2554932 기사/뉴스 [속보] "바이든, 러시아 내부 공격에 장거리미사일 제한 해제"<NYT> 16 03:32 2,559
2554931 이슈 미국 주식 2년 6개월 투자해서 10억 만든 사람.jpg 16 03:16 4,940
2554930 이슈 비주얼 정말 예뻤던 어제 2024 KGMA 카리나.jpg 8 03:05 2,611
2554929 이슈 입양 한 달 차 고민이 많은 부부, 생후 9일 만에 입양된 19살 수아를 만나다.jpg 15 03:05 4,868
2554928 기사/뉴스 `야수의 심장` 마이크로스트래티지, 비트코인으로 미국 금융자산 `13위` 2 03:04 1,510
2554927 이슈 2001년 대학로 길거리 모습들 24 02:54 3,009
2554926 유머 오늘 광야갔다가 놀람 진짜 미감 구림... 39 02:52 6,504
2554925 유머 주식 28년차 고수의 매매 방법.jpg 3 02:52 2,791
2554924 이슈 🐼 루이바오와 후이바오 💜🩷 500일 🎉🎉 19 02:34 2,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