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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현재 한국과 다른 신분제 사회였지만 과거를 통한 문은 열려 있었다. 양반이라도 '제대로 된 양반'이 되려면 과거의 벽을 넘어야만 했다. 입신양명하고 출세하려면 과거 급제가 필수였다. 문제는 과거 준비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는 데 있다. 지금의 우리 입시 교육도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살인적인 수준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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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당시도 한양이 입시 교육의 메카였다. 요즘도 비수도권 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해 서울 강남권에 거주하며 초단기 입시 과외를 받는데, 조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 지역거점국립대인 향교에는 제대로 책이 갖춰지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한양에 살지 않는 이라면 과거 준비를 위해 한양으로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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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불공정 경쟁이 펼쳐지니 조선 후기로 갈수록 한양에 대대로 산 한양 출신들의 힘이 강해졌다. 대표적 세도정치가로 알려진 안동김씨, 반남박씨, 풍양조씨 등이 모두 한양에 오래 뿌리 내리고 산 집안이다. 저자에 따르면 한양과 비한양 간 입시 경쟁력에서 얼마나 큰 차이가 났는지 알 수 있다. 전체 문과 급제자의 61.5퍼센트가 한양과 경기도 출신이었다. 나머지 30퍼센트가량이 남쪽 지방, 즉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 출신이었다. 북쪽 지방 출신은 완전히 찬밥 신세였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차별을 받은 지역이 평안도로 꼽힌다. 훗날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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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도 유명한 입시 전문 선생이 있었다. 정학수라는 사람이다. 그가 서당을 열었는데 그에게 과외받기 위해 모여든 선비가 백여 명에 달했다. 그야말로 당시 손꼽히는 대형 학원이었다. 그런데 정학수의 신분이 좀 남다르다. 성균관의 반인, 곧 성균관에서 청소나 요리 등 허드렛일을 하는 천민이었다. 천민이 가르치는 학원에 선비들이 모여들었으니, 정학수가 얼마나 뛰어난 일타강사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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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352552?sid=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