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러모로 화제성 가득한 왕인 숙종
숙종은 “중전이 질투하는 마음에 나를 공갈하니…그 간교하고 앙큼함은 폐간(肺肝)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했다. 이에 서인 정권을 쫓아내고 천신만고 끝에 정권을 되찾은 남인계 신하들마저 숙종의 ‘부인 험담’에는 반기를 들었다. “부부의 불화를 자식같은 신하들에게 털어놓는 이유가 뭐냐” “중전께서 국모로 계신지 10년이 되도록 무슨 실덕(失德) 있었기에 이런 하교(험담)를 내리시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중전과 가까운 귀인 김씨(서인 김수항의 종손녀·1690~1735)마저 ‘험담의 도마’에 올렸다.
“아 글쎄. 내가 대신들과 나눈 이야기를 적은 쪽지를 놓아두었는데, 귀인이 그것을 소매 속에 감추었다가 들켰다네. 내가 ‘왜 그랬냐’고 하니까 귀인이 ‘버리는 휴지인줄 알았다’고 변명하더라"
숙종은 “이번 일이 우연이 아니며 국가에 반드시 화난이 있을 것”이라고 침소봉대했다. 숙종은 일사천리로 중전의 폐위절차를 진행했다. 4월22일 중전과 친한 귀인 김씨를 우선 폐출시켰다.
마침 23일인 중전(인현왕후)의 탄신일이었는데, 숙종은 중궁전에 들어온 생일선물까지 “내치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루라도 국모의 자리에 있게 해서는 안된다”는 페출 전교를 내렸다. 3일 뒤인 26일에는 날마다 중전에게 들이던 음식을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굶으라는 얘기였다.
- 인현왕후는 폐출전 음식을 받지 못 하고 굶다가 쫒겨났다.
“폐비가 집으로 돌아간 뒤로 친척과 이웃에서도 감히 문안하고 왕래하지 못합니다. 문을 잠가서 뜰에 풀이 가득하고 적막하며 양식과 땔나무가 군색한 것은 참으로 말할 것도 없습니다.”(<숙종실록>)
남인 정권의 실세들조차 “민씨를 별궁에 모시고, 달마다 녹봉 형식의 쌀을 주면 성상의 덕이 빛날 것”이라고 간청했다.
처음엔 “그러자”고 허락했다가 곧 그 명을 취소한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안되겠다. 죄악이 가득차서 폐출한 지 반 년도 안되는 폐비를 대우했다가는 뜻을 잃은 무리(서인)가…‘옳다구나’ 하면서 변란을 일으킬 것이다.”(<숙종실록> 1689년 9월24일, 10월18일)
- 안 돼!
복위때 내린 글 보면 내가 인현왕후여도 짜증 날 듯
“왕비 민씨는 단장(端莊)하여 예법을 지키고 정정(貞靜)하여 아름다움을 지녔다.”(<숙종실록> 1694년 6월1일)
- 밥도 굶겨 쫒겨낸 남편이 내린 글
속이 편하면 이상할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