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이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손을 빌렸어요. 부모님 덕분에 밥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일본 도쿄 세타가와구에 사는 50대 직장인 가와무라 다쿠지(가명)는 지난 13일 "고향인 기후현에 사는 부모님에게 이달 초쯤 '쌀을 보내달라'고 연락했다"고 말했다. 25년 전 도쿄 생활을 시작한 후 집에 쌀을 보내달라고 연락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가와무라는 "곧 슈퍼마켓에 들어오지 않을까 생각하며 2주를 버텼는데 동네를 다 뒤져도 쌀을 찾지 못했다"며 "집에 남은 쌀이 거의 다 떨어질 때쯤 부모님께 쌀 20㎏을 받았다"고 말했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쌀 부족 현상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본국에 SOS를 요청하는 신세에 이르렀다. 지난달 말 가족들과 함께 도쿄에 정착한 30대 이은진(가명)씨는 일본에 온 지 보름 만에 한국에 있는 부모님에게 국제택배로 쌀과 햇반(즉석밥 상품)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일본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이 생활 정보를 얻는 맘카페에 '한국에서 쌀을 받는 방법'이라는 글이 꽤 올라오자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이씨는 "일본에 오자마자, 그것도 선진국에서 이런 일을 겪으니 무척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일본 쌀 부족 현상 원인은 이상기후
일본에서 쌀 부족 현상이 벌어진 원인은 크게 3가지로 꼽힌다. ①코로나19 사태로 줄었던 외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쌀 소비량이 갑자기 증가했기 때문이다. 일본정부관광국(JNTO)에 따르면 지난 1~7월 매달 300만 명 넘는 외국인 관광객이 일본을 찾았다. 지난달에는 태풍과 폭염의 영향으로 월 방일 외국인 관광객 수 300만 명이 깨졌지만, JNTO는 올해 연간 외국인 관광객 수가 3,0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예측했다. 일본 농림수산성은 지난 6월 기준 외국인 관광객의 쌀 소비량이 지난해 6월보다 3만 톤 늘었다고 추산했다.
②최근 난카이 해곡 대지진(태평양 연안 일대에 100~150년 주기로 일어나는 대지진) 주의보 발령으로 쌀 사재기 현상이 벌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 기상청은 지난달 8일 규슈 미야자키현 앞바다에서 규모 7.1 강진이 일어나자 난카이 해곡 대지진 발생 확률이 평상시보다 높아졌다며 일주일간 주의보 격인 '임시 정보(대지진 주의)'를 발표했다. 기상청이 이 시스템을 운영한 후 처음으로 임시 정보를 발표하자 일본인들은 혹시 모를 대지진 대비에 들어갔다. 그중 하나가 쌀 구매였다. 민간조사회사 인테지에 따르면 임시 정보 발표 이튿날인 지난달 9일 일본 전국 쌀 매출액은 지난해 8월 9일의 2.1배로 뛰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다른 데에 있다. 쌀 소비 증가나 사재기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시간이 지나면 해소되기 때문이다. 야마시타 가즈히토 캐논글로벌전략연구소 연구주간은 마이니치신문에 "매달 약 300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일본에 머물며 아침, 저녁에 쌀을 먹는다고 해도 외국인 관광객의 쌀 소비량은 전체의 0.5% 수준에 불과하다"며 "소비가 조금 증가한 것은 사소한 변화"라고 말했다.
일본서 쌀 구하기 '하늘의 별 따기'
가와무라만의 일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올여름 쌀을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었다. 지난 6월부터 쌀 공급이 불안정해지더니 지난달 초부터는 일본 전국 대형마트와 슈퍼마켓의 쌀 매대가 텅텅 비기 시작했다. 쌀 부족 문제가 예상보다 길어지자 대형마트와 슈퍼마켓은 '가구당 1봉지만 구매 가능', '즉석밥 한 묶음만 구매 가능'이라는 문구를 붙이고 구매 제한을 걸었다.
이달 중순 들어 햅쌀이 유통되면서 상황은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 일본에서는 쌀을 원할 때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상태다. 도쿄 주오구의 슈퍼마켓 체인점 한 직원은 "그래도 9월 들어 하루에 쌀 30~50봉가량이 들어오는데 들어오는 즉시 매진"이라며 "쌀 대란이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다"고 말했다.
기이한 현상에 일본 사회에서는 '쌀 부족 2024', '레이와(2019년부터 사용한 일본의 연호) 쌀 소동'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최남단 오키나와로 쌀 구입 여행
쌀 구하기에 비상이 걸리자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현까지 내려가 쌀을 사는 진풍경도 벌어지고 있다. 오키나와현은 그나마 다른 지역보다 쌀 수급이 안정적이라는 입소문을 타서다. 관광객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전 쌀을 사 가거나 5㎏짜리 쌀을 택배로 보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오키나와현 이시가키시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와부치 요시히로는 현지 지역 언론인 오키나와타임스에 "오사카에서 온 한 남자 손님은 '비행기 수하물 가방에 쌀만 넣어 보냈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상기후에 쌀 수확량 감소
쌀 부족 현상이 벌어진 근본적인 원인은 ③이상기후로 소비자에게 내놓을 쌀이 잘 자라지 않아서다. 일본에서 쌀 수확량 자체는 줄지 않았다. 농림수산성이 발표한 지난해 작황지수(쌀 수확량)는 평년 수준인 101이었다. 숫자가 100 이상이면 쌀 수확량에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대흉작으로 쌀 부족 현상이 극심했던 1993년 작황지수는 74였다.
하지만 이상 고온 현상으로 쌀 품질이 떨어지다 보니 판매 가능한 쌀이 줄고 있는 것이 문제다. 현재 생산되는 쌀 품종은 대체로 고온에 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18일 도쿄 한낮 최고기온은 35.1도로, 기상청이 1875년 관측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9월 중순 이후에도 최고기온이 35도가 넘는 날이 나왔다. 올해 7월 일본 전국 평균 기온은 26.2도. 관련 조사를 시작한 1898년 이후 역대 가장 더운 7월로 기록됐다.
폭염 강도가 갈수록 강해지고 길어지면서 색이 탁하게 변색된 쌀이 많아지면서 도매업체들이 백미를 도정하는 정미 수율이 떨어졌고 쌀 유통량이 급감했다. 2023년산(2023년 7월~2024년 6월) 1등급 쌀 생산 비율은 61.8%로, 전년보다 20%포인트나 떨어졌다. 이 영향이 올여름까지 이어지며 쌀 유통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농업경제학자인 오이즈미 가즈누키 미야기대 명예교수는 마이니치에 "이상 고온으로 지난해 판매할 수 없는 쌀이 늘어난 결과 쌀 전체 생산량의 80% 정도만 유통된 것으로 예측된다"고 말했다. 일본 전국 민간 쌀 재고량은 지난 6월 기준 전년 동기 대비 41만 톤 감소한 156만 톤에 그쳤다. 1999년 이후 가장 적었다.
쌀 생산 줄다 보니 가격은 급등
소비자가 살 수 있는 좋은 품질의 쌀이 줄다 보니 쌀값은 최고가를 경신했다. 농림수산성이 지난 17일 발표한 2023년산 쌀 8월 도매가는 전 품목 평균 60㎏당 1만6,133엔(약 15만327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7% 상승했다. 8월 평균 쌀 도매가 조사를 시작한 2006년 이래 가장 크게 뛰었고, 최고가도 경신했다. 기존 최고가는 2013년 8월 1만6,127엔(약 15만271원)이었다.
일본 정부는 애초 2023년산 쌀 거래가를 평균 1만5,300엔(약 14만2,565원) 전후로 내다봤지만, 쌀 부족 현상에 가격이 급등한 것이다. 쌀 도매업체 한 직원은 요미우리신문에 "많은 도매업자가 재고 확보를 위해 평년보다 고가로 쌀을 매입하고 있어 가격이 뛰고 있다"며 "이달 말이 돼도 햅쌀값은 5㎏에 2,500엔(약 2만3,295원) 정도로, 지난해보다 1,000엔(약 9,318원) 정도 높을 것"이라고 말했다.
https://v.daum.net/v/20240923043231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