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삼남매의 둘째 딸로 태어났어요. 그래서 위로는 한 살 차이 나는 언니가 있고, 밑으로는 다섯 살 어린 남동생이 있어요. 덕분에 굉장히 전쟁같은 삶을 살았는데요(웃음).
자원은 한정되어있고 사람은 많을 때 굉장히 많은 싸움이 일어나잖아요. 그래서 저는 어릴 때부터 파이터로 살았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실내화라든지, 내일 입을 옷이라든지, 하나 남은 라면봉지라든지. 그런 것들을 두고 정말 치열하게 싸웠었어요. 그렇게 하지않으면 제 몫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어릴 때부터 좀 시끄럽고, 자기주장도 강하고, 할 말은 하고 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제가 가수의 꿈을 꾸게 되었어요. 저는 제 주장을 항상 강하게 말했던 편이기 때문에 제가 가진 생각들을 항상 이야기하고 다녔었거든요. 그래서 학교에서 보컬동아리도 했었고, 댄스동아리도 했었고 어떻게 보면 좀 유명했어요.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을 하다 보니까 저에게 어떻게 보면 충고, 혹은 조언이 섞인 악담을 하는 분들이 계셨어요. 왜냐하면 너무 허황된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졌나 봐요. 저희 담임 선생님은 제가 가수의 꿈을 꾼다고 하니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예은이는요, 그 왜 호텔 가면 있잖아요. 그 엘리베이터에서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하는 분들 있어요. 그런 직업을 하면 딱이에요.”
그런 말씀을 항상 저에게 하셨어요. 고지식했던 한문선생님은 제가 가수의 꿈을 키우고 있다고 하니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 같은 애들 정말 많이 봤는데, 지금 걔네들이 다 뭐 하는 줄 아니? 다들 밤업소에서 서빙하고 있어.”
저는 그분들을 절대 비하하거나, 낮춰보려는 의도가 아니고 그게 제가 (가수가 되겠다고 말해서) 고등학교 때 들었던 이야기예요.
(*계속된 父의 외도로 母父가 2000년에 이혼한 후 삼 남매 모두 모친 품에서 성장함. 싱글맘이었던 모친이 너무 힘들어했기 때문에, 자신까지 기댈 수 없다고 생각한 예은은 학교에서 누구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았음.)
그리고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저를 직접 가르치는 선생님은 아니셨어요. 야자시간에 잠깐 감독하러 들어오셨는데 그 때 제가 짝꿍이랑 떠들고 있었어요. 야자 감독 선생님은 그런 저희 둘 머리를 콩콩 때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대가리에 든 거 없이 춤만 추고 다녀서 나중에 뭐가 될래?”
아, 안타깝죠. 저 사실 정말 창피하고 무안했는데, 정말 다행히도 그때 제 옆자리에 앉았던 제 짝꿍이 그 선생님한테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선생님, 예은이 저희 반 일등인데요.”
네, 공부하길 참 잘했습니다(웃음).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요, 사실 저는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어요. 그러니까 옛날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거든요.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야 너 그때 그랬었잖아, 이랬었잖아’하면 저는 하나도 기억을 못 해요. 정말 지우개처럼.
그런데 이렇게 제 마음속에 오래 남는 일들이 있어요. ‘왜 이렇게 안 잊혀지지? 왜 그때 그 순간들이 선명하게 기억나지?’하는 순간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어요.
‘왜 나는 이 일들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날까?’하고 생각을 해보니까 제가 그 당시에 제 이야기를 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그 상황에서 저는
“아니요! 저 춤만 추는 거 아니고, 공부도 열심히 하거든요.”
“아니요! 저는 열심히 해서 꼭 가수가 될 거예요.”
“저는 제 꿈을 꼭 이룰 거예요!”
라는 말을 하지 못했어요.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오디션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도 어떤 회사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어떻게 보면 재능도 부족했고, 끼도 부족했고. 당연히 주변에서 봤을 때는 그만하라고 하고 싶었겠죠, 이제 곧 고3인데. 공부도 그럭저럭하는 애가 지금 꿈 찾는다고, 가수 되겠다고 저러고 다니다가 정말 아무것도 안 될 수도 있잖아요.
저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내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없고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그분들한테 당당하게 얘기하지 못했던 거죠.
그런데 만약에 지금의 제가 시간여행을 할 수 있어서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어떨까요? 그럼 저는 그 선생님들한테 당당하게 얘기할 거예요.
“아니요! 저 가수되거든요!”
그렇게 꿈만 꾸던 저는 온갖 걱정과 조언과 충고를 듣던 그 다음 해(2007년)에 원더걸스로 데뷔를 하게 됩니다. 데뷔하고 나서도 쉽지는 않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노래를 많이 불렀고, 제가 하고 싶은 춤을 많이 췄고. 많은 분들을 만났고, 많은 사랑을 받았고 굉장히 행복한 시간을 보냈죠.
그런데 저는 지금 이 자리에 핫펠트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이 핫펠트라는 이름은 제가 2011년에 JYP 작곡가로 계약을 하면서 사용하게 된 프로듀서 이름인데, 저는 데뷔하기 전부터 곡을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음악이라는 게 주는 힘이 좋았거든요. 굉장히 짧은 시간에 갑자기 사람의 마음에 가서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잖아요. 그런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저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만, 노래를 저 혼자 만들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2014년도에 솔로 앨범을 준비하게 되면서, (17곡 중) 7곡을 준비해서 회사 분들에게 들려드렸어요. ‘저는 이렇게 미니앨범을 내고 싶습니다’ 하면서 회사 분들을 많이 모아놓고 1번 트랙부터 7번 트랙까지 쫙 들려드렸어요. 다들 많이 난감해하시더라고요.
혹시 제 1집 앨범을 들어보신 분 계시나요? 들었을 때 많이 난감하셨나요? 안 들어보신 분들이 많으셔서(웃음). 좀 많이 우울하고,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담겨있고 많이 어두워요.
사람이 생각하는 원더걸스로서의 저의 모습, 원더걸스 예은으로서의 저의 모습은 밝고 당당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이었는데 제가 가지고 온 음악은 그렇지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회사의 많은 분들이 당황을 하셨죠.
“예은아, 왜 그러니. 내가 아는 너의 모습을 정말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인데, 왜 너한테는 이런 어두움이 있니?”
굉장히 궁금해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궁금했죠. 도대체 저는 왜 이럴까요?
제가 가수의 꿈을 꾸게 되었던 어린 시절. 저는 SES와 핑클, 베이비복스를 보면서 자랐어요. 그들을 보면서 춤을 따라 하고, 친구들이랑 모여서 안무 연습을 하고 장기자랑도 나가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우림의 노래를 들으면서 제 안에 쌓여있던 슬픔이나 분노를 표현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 속에 있는 감정들을 풀어냈을 때는 좀 많이 어둡고, 조금 많이 우울하고..
제가 내렸던 선택은 예은으로서 많은 분들이 기대하셨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닌, 핫펠트로서 제 음악을 보여주는 것이었어요.
물론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지 않을 수도 있고, 많은 분들이 불편해하실 수도 있어요. 이런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냥 예은하지, 왜 핫펠트야?
그냥 대중적인 거 하지, 무슨 자기 음악이야.
그냥 아이돌 하지, 무슨 아티스트야.”
그런데 이런 말 여러분들도 많이 듣지 않으세요? 아닌가요? 살다 보면.. 제가 정말 느낀 건데요. ‘그냥 뭐뭐하지, 웬 뭐뭐뭐야’라는 말 중에 정말 진심어린(heartfelt) 말은 단 한마디도 없어요.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10년 전에도 들었었거든요.
“그냥 공부나 하지, 웬 가수야.
그냥 대학이나 가지, 웬 가수야.”
미래는 정말 아무도 알 수 없잖아요. 그런데 왜 그분들은 왜 당당하게 마치 미래를 내다본 것처럼 얘기하는 걸까요?
10년 전 아무것도 아닌 고등학생 예은에서 원더걸스 예은이 되는 과정이 힘들었듯이, 지금 원더걸스 예은에서 핫펠트가 되는 과정도 굉장히 길고 어렵고 복잡합니다.
그런데 저는 저에 대한 확신이 있어요. 세상 누구보다 제가 제 자신을 잘 안다고 믿고, 누가 뭐라고 하든지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갈 거예요.
저에게 이런 확신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Girls Be Loud’ 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굉장히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Boys Be Ambitious’
왜 여자들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없을까? 그런 말을 하나 만들고 싶었어요. 제가 감히 뭐라고(웃음), 제가 그럴 위치는 아니지만.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진짜 멋진 말이죠. 우리 여자들도 야망이 있죠? 그렇죠?
다만 우리는 좀 더 고민하고 망설이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많은 선례들이 없었고.
사회에서 주어지는 여성에 대한 역할이라든지, 시각이라든지, 사람들이 기대하는 어떤 부분들에 있어서 우리의 야망이 부딪힐 때가 참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말이 주는 힘을 믿어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제 고등학교 시절에 선생님들이 해주셨던 말들이 비수가 되어서 제 가슴에 박혀있기도 하고, 저에게 따듯한 등불이 되어서 아직도 제 가슴속을 비춰주고 있기도 해요.
살다 보면 우리는 점점 우리에게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우리를 응원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보다는.
우리를 깎아내리고, 우리를 멈춰 서게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많잖아요. 그럴 때 우리 스스로 나 자신에게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요.
“난 할 수 있다. 나는 잘하고 있다.
나는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다.”
라는 이야기를 우리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에게 정말 소중한 멘토가 되어주시는 언니가 계세요. 며칠 전에도 선물과 함께 편지를 보내주셨어요. 많은 말들이 적혀있었지만, 그 중 한 구절이 제 마음속에 쾅하고 박혔어요.
소향 “예은아, 세상이 참 너에게 파도같구나.”
세상은 가끔씩 가만히 서 있는 저에게 파도처럼 밀려올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겠죠.
정말 다행인 것은 제가 얼마 전부터 서핑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죠(웃음). 그래서 저는 저에게 불어오는 파도를 잘! 탈 거예요. 여러분들도 (인생의) 서핑을 꼭 배우시길 바라요. 지금까지 싱어송라이터 핫펠트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2018 원더우먼 페스티벌 핫펠트 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