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응급실 블랙리스트’ 작성·유포자에 대한 경찰의 수사 착수에 의료계가 반발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정부가 일부 의사들의 일탈행동을 이용해 현 의료대란의 책임을 의료계에 전가하려고 한다’, ‘정부가 잘못된 의료정책을 강행함으로써 촉발된 현 의료대란 사태를 조금이라도 해결하기 위해 각종 회유책과 협박을 반복한 것이 의료계 내 갈등 발생의 원인이다’라고 주장했다. 의협 관계자의 개인적 발언이 아닌 의협의 ‘공식 입장’이다.
의협이 어떤 의도를 갖고 사태를 축소하려는 것은 아닐 거라 믿는다. 그렇다면 이런 반응은 의협이 ‘응급실 블랙리스트’ 작성·유포를 정말 ‘일부의 일탈’이라고 생각하기에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응급실 블랙리스트’ 사태와 관련한 의협의 입장은 부적절하다.
첫째, ‘응급실 블랙리스트’는 개인의 일탈이 아닌 집단의 범죄행위다. 블랙리스트에는 응급실 근무 전공의·군의관·전임의 등의 이름뿐 아니라 휴대전화 번호, 출신 학교, 대학·학창시절 교우관계와 평판, 현재 가족관계와 대인관계, 소문 등 개인정보가 상세히 기재돼 있다. 블랙리스트 작성자가 응급실에 근무하는 모든 의사의 개인정보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명의 제보자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제보자 또한 의사일 가능성이 크다. 수백 명의 의대생과 전공의 등이 관여한 개인정보 침해 행위를 ‘개인의 일탈’로 보기 어렵다.
둘째, 의협과 전공의단체, 의대생단체는 이런 ‘응급실 블랙리스트’를 묵인·방조해왔다. 어떤 자정 노력도 없었다. 이쯤이면 공범이다.
셋째, 의협은 ‘응급실 블랙리스트’가 ‘절박함’ 때문에 작성됐다고 했다. ‘어떤 절박함인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블랙리스트 작성·유포는 응급의료 붕괴에 일조하고 있다. 집단적 따돌림 또는 괴롭힘이 두려워 전공의들은 복귀를 미루고, 군의관과 공중보건의사들은 응급실 진료를 거부하고, 남은 응급실 의사들은 추가로 현장을 떠나고 있다. 모두 예측 가능한 결과다. 목적이 어떻든 결과가 예측 가능한 행위를 했단 건, 그 예측도 목적에 포함된단 의미다. 환자가 응급실을 못 찾아 죽어나는 상황을 감수해야 할 절박함이란 건 상식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넷째, 의협은 ‘응급실 블랙리스트’ 작성·유포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공격하고 비난하며 동료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응급실 블랙리스트’의 본질은 ‘의료붕괴 유도’다. 이를 ‘의사 간 갈등’으로 본다는 건 국민과 환자는 의협의 안중에 없다는 방증이다. 그저 의료계 내 갈등으로 대정부 투쟁 동력이 약화할까 하는 두려움만 읽힌다.
의협이 정말 국민을 위해 투쟁하는 거라면, 최소한 ‘환자를 지키는’ 의사들을 겁박하고 조리돌림 하는 행위는 중단시켜야 한다. 우선은 경찰 수사와 별개로 협회 차원에서 블랙리스트 작성·유포자를 징계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의협이 ‘공범’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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