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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은 기자]
정선희. 사진ㅣ유튜브 채널 ‘들어볼까’ 화면캡처
정선희는 “결혼을 통해 아빠에게 받지 못한 평화를 온전히 찾고 싶었다. 평화로운 가정을 영위하고 싶었다. 내가 받지 못한 것을 다 받고자 생각했다. 안이한 생각이었다. 결혼 후 한 사람의 영혼을 내 인생에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무게감을 직접적으로 느꼈다”고 말문을 열었다.
정선희는 “어려움도 있지만, 극복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모르던 부분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더라”며 “남편이 금전 문제로 엄청 우울함을 느꼈다. 다른 것보다 그 금전 문제가 성큼성큼 그를 갉아먹고 있었는데 몰랐다. 왜냐면 내가 일이 너무 바빴다”고 故 안재환에 대해 회상했다.
이어 “그랬는데 결혼 10개월 후 그가 세상을 떠나더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처음 든 생각은 ‘현실 부정’이었다. ‘에이 말도 안 돼.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난다고?’라고 생각했다. 실종신고를 안했던 것도 당연히 (집에) 올 것이라 생각했다. 돈 문제로 조금 불화가 있었다. 그때 내가 돈 있는데도 빌려주지 않았다고 오해한 것인가 싶었다. 그래서 복수하나 싶었다. 유치하지만 그런 생각까지 했었다”고 얘기했다.
정선희는 “그런데도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실종신고를 안 한 이유는 연예인이기 겪을 타격이다. 남편도 당시 사업을 하고 있으니 내가 숨겨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들어오면 가만 두지 않겠다. 내가 바가지를 있는 대로 긁겠다’는 마음이었다. 화풀이해야겠다는 가벼운 마음이었지, 사망소식과 함께 돌아올 줄 몰랐다”고 털어놨다.
정선희는 “현실부정 다음에는 죄책감이었다. ‘내가 이렇게 했기 때문일까’, ‘내가 안 된다고 해서 일까’, ‘내가 돈을 마련해주지 않아서 일까’, ‘내가 조금 쌀쌀 맞게 말해서 일까’ 등 내 모든 행동에 대해 복기하게 되더라. 어디서부터가 단초가 됐을까 싶었다. 혹시 나로 인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이런 생각은 피를 말린다. 그의 선택을 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도 생각했다. 어느 날은 문득 이 사람이 사라졌다는 상실감까지 오더라. 결혼 10개월이면 한참 배우자를 사랑할 시기였다. 아무리 부부싸움을 해도 사랑한다는 마음이 근본적으로 지배할 때다. 보고 싶음과 슬픔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을 때 누군가 십자가에 못 박을 대상을 찾는다. 그게 나였더라. ‘쟤가 입을 잘못 놀려서야’, ‘쟤가 뭔가 문제가 있어서야’, ‘둘이 같이 납치됐는데 쟤만 돈 주고 풀려 난거야’ 등의 유언비어가 실제 보도로도 됐다. 지금보다도 상도(보도준칙, 윤리강령)가 없을 아비규환이었을 때였다”고 고백했다.
정선희는 “사정을 빤히 아는 사람도 날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 같았다. 참고인 진술이 아니라 마치 가해자 선상에서 취조당하는 느낌이었다. 정말 하지 않아도 될 경험을 했다. 그러면서 슬퍼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내가 유족인데 마땅한 권리(슬퍼할 시간)조차 누리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故 안재환) 가족에게 무언가를 해명해야 했다. 그런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신앙심도 사라지더라. 신이 날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택한 게 날 해치는 거였다. ‘당신이 버린 딸에 철저하게 망가트려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건 살려달라는 신호였다. 너무 외롭고 쓸쓸했다. 가족, 친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편인 사람들 신경 쓸 시간도 없었다. 내 편이었던 사람들(당시 팬들)이 돌아서서 ‘정선희는 어쩜 저렇게 무서운 여자일 수 있을까’, ‘남편이 죽었는데 뻔뻔하게 방송을 7개월 만에 복귀해 라디오에서 깔깔 거리면서 웃을 수 있을까 사이코패스 아냐’, ‘정선희 무서워 소름 돋아’, ‘정선희가 죽었으면 좋겠어’ 등의 악성 댓글을 달더라”고 결국 눈물을 보였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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