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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의사커뮤펌]대병 신경외과 의사가 뇌수술을 그만두고 동내 개원가에서 통증진료만 하며 살게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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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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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나의 어두운 기억이다.

또한 삶의 전환점이 된 사건의 독백이기도 하다.


의료 소송을 당해 본 적이 있는가? 살면서 한 번은 걸리게 되어 있다지만, 대부분 고소하겠다는 협박으로 돈을 뜯긴 경험이 있을 뿐, 실제 소송을 겪은 의사는 많이 쳐 줘야 서넛 중 한명일 것이다. 그것이 형사라면 더더욱.





10년이 조금 넘은 겨울. 30대 중반 여자가 의식이 쳐지고, 편측 감각 및 운동능력 상실로 왔다. 

GCS는 6점, Hunt-Hess는 4등급. Onset time은 불명.

뇌졸중 의심하 ER과장님이 CT를 찍었다. 듣자하니 근처 3차 NS당직 교수님이 수술 중이라며 내 앞으로 온 것이었다.


키가 크고 삐쩍 말라 있었다. 쇄골 위를 쎄게 눌렀는데, 피부 느낌이 이상했다. 마치 50대처럼 탄력이 없었다.

병력은 알 수 없었지만, 진단되지 않은 결체조직 질환이 있을 가능성이 짚였다.

패닉에 빠진 환자의 언니는 매우 irritable하여 전혀 도움이 안 됐다.


CT결과는 금방 나왔다. SAH. 

우뇌반구 전체의 피질-수질 경계가 사라진 걸로 보아 못해도 10시간 이상 지났고, 잔뜩 부은 뇌가 falx를 밀어내고 있었는데, 다행히 실질내 혈종이나 뇌탈출은 없었다.

CT Angio를 보니 전교통동맥(A-com)과 , 중대뇌동맥(MCA)의 가장 굵은 가지(M1)가 부풀어 있었다.

A-com 은 5mm로 양호했지만, MCA 상태는 최악이었다. 


Rt. MCA fusiform aneurysm, M1 segment, 21mm, probably ruptured.

신경외과 의사라면 이것이 죽음을 뜻한다는 것을 직감하기 마련이다…




젊은 인구의 1%에서 생기는 뇌동맥류는 대부분 혈관이 갈라지는곳(bifurcation)에서 생기고, 그 모양은 99%가 주머니형(saccular)이다. 이 경우, 부풀어 오른 부분만 클립으로 집어 주거나 코일로 채워 주면 된다.


하지만 이 젊은 환자의 머릿속에는 파이프 한 가운데가 술통 모양으로 부풀어 오르는 방추형(fusiform) 뇌동맥류가, 가장 중요한 혈관에 자리잡고 있었다. 

유전자와 운의 장난으로 잉태된 동맥류는 심장이 피를 뿜어낼 때마다 점차 크기를 키우다 마침내 터진 것이다.




이 상황에서 MRI를 찍고 T2플레어, PWI따위를 보는 건 큰 의미가 없었다.(그때 MRI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선택지는 3가지였다. 

혈관내 접근으로 막아 보던가, 머리를 열거나, 보존치료를 하며 기다리다 지연수술 기회를 잡는 것.

동맥류의 위치와 모양으로 볼 때 혈관내 색전술은 힘들었다. 동맥류의 neck이 없어 coil이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모동맥을 막아 버릴 수도 없다. 당시는 stent등이 국내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던 때라 advanced technique도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머리를 무턱대고 열 수도 없었다. 열자마자 뇌가 두개골 사이로 잔뜩 삐져 나올 것이 뻔했다. 

내가 죽은 조직을 자르고, 걷어내고, 당기기를 열 시간 가까이 반복하며 혈관에 접근하는 동안 젊은 마취과장은 뇌관류압 유지와 재출혈 방지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한다. 테이블 데스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만일, aSAH가 아니라 intra-cerebral이나 mixed였다면 나는 지체 없이 열었을 것이다.




결국 두 가지를 더 고려해 결정했다.

환자의 초기 신경학적 상태가 많이 나쁘다는 점. 클립 불가한 동맥류에서 포장술(wrapping)과 보존적 치료는 예후가 같다는 점.


머리에 모니터링을 위한 조그마한 구멍만 뚫고 NSICU로 올렸다.


사흘 밤낮을 지켰다. 잠시 집에 씻으러라도 가면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만 같았고, 그렇게 보내기엔 너무 아쉬운 나이였다.

신경학적인 호전은 없었지만 재출혈도, vasospasm도 없이 급성기는 지나갔고, 뇌압도 느리지만 떨어지고 있었다. 

전보다 나아지긴 하지만, 내게는 버거운 케이스라고 생각해 모교 병원으로 보냈다. wrap과 clip을 둘 다 한 후, 퇴원해 요양병원에 입원했다는 말까지 듣고 소식이 끊겼다. 






예기치 못한 일은 몇 달 뒤에 일어났다. 

오전 외래를 끝내고 문을 나서는데 남자 두 명이 앞을 가로막더니 신분증을 보여주며 핸드폰을 받아야겠다고 했다. 거부하니 영장을 보여주더라. 

내가 업무상과실치사의 피의자로 되어 있었고,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기에 압수수색의 필요성이 긴급히 인정된다는 문장에 판사 도장이 찍혀 있었다. 

게다가 혹시 도망갈까봐 경찰 한 명은 카메라를 들고 반대쪽 복도를 가로막고 있었다. 



보호자에게 진료기록은 ER과장이 떼어 주었는데, 경찰은 그걸로 모자라서 서버실에 이상한 기계를 꽂고 관련 내용을 전부 복사해 갔다고 한다.



경찰이 다녀간 뒤에 온 병원에서 내 얘기밖에 안 들렸다. 지금도 잊지 못할만큼 살면서 가장 기분 더러웠던 순간이다.

진료에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병원장이 부르더니, 자기네 자문 변호사를 붙여 주겠다고 하더라. 





여섯 차례에 걸쳐 변호사 동석 하에 경찰 조사를 받고, 검사까지 만났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수술방, ER 간호사랑 응급구조사들도 참고인으로 불렀다고 한다.

무례한 인성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던 경찰과 달리 검사는 정갈한 인상이었고, 최소한의 존중을 보여줬다.

여검사의 그 흘리는 듯한 웃음은 묘하게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우편으로 날아온 송치결정서를 받아들기 전까지는 모든 게 잘 될 것만 같았다.




공소장이 한번 더 날아오고, 나는 법원 제출용 의견서를 며칠에 걸쳐 매우 상세히 썼다. 

변호사가 고칠 부분이 없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귀찮아서 그랬던 것도 같다. 

아무튼 자기는 수사단계까지만 같이 하기로 수임계약이 되어 있고, 공판절차 변호를 받기 위해서는 개별적으로 선임해야 한단다. 결국 끝까지 같이 가기로 했다.


법정에 서니 직원도, 동료도, 돈주고 산 변호사도, 심지어 가족조차,, 내 편은 없더라…





첫 공판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판사가 신분 확인을 끝내고, 검사가 모두진술을 시작했다.

그놈은 내 의료행위를 범행으로, 환자의 불가피한 죽음을 범죄로 지칭했다.(공판 검사는 수사검사랑 다른 놈이다.)

뭐라도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주먹을 꽉 쥐는 것 밖에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검사가 제기한 공소사실을 단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사실심리가 길어져 진료에 막대한 차질이 생겼다.(민사와 달리 형사재판에는 아무리 중요한 사정이 있더라도 의무적으로 나가야 된다.)


나는 지금 당시로 돌아가도 같은 치료를 할 것이고, 의무기록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작성했다. 

환자는 요양병원에서 폐렴을 비롯한 내과적 질환으로 expire했고, 원래 massive SAH는 치명률이 50%를 웃도는 질환이다.


반면 검사의 증거는 부실했다. 

철 지난 한글 가이드라인 몇 개와 비의사 조정위원의 의견, 그리고 보호자측의 일방적인 주장이 사실상 전부였다.




두 번째 심리에서는 검사 측이 내원 당시의 객관적인 환자 상태와 기록의 일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ER과장님과 응급구조사를 증인으로 불렀다. 

그런데 외려 이것이 판사에게 결정적인 심증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의 진술과 나의 기록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세 번째 방문하는 법원은 익숙해졌지만 마음 한 구석의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감정의 의견서와 의학적 기준을 토대로, 가능한 최선의 처치가 이루어졌는지의 여부를 따졌다. 

천만다행으로 의견서에는 21mm의 fusiform M1 seg.파열로 발생한 SAH는 극도로 희귀한 고난도의 질병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상황에서 개두술을 섣불리 시행했다면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밖의 어떤 치료로도 상태 호전을 장담하기는 어렵다는 답변이 스크린에 뜨는 순간 변호사는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안도해도 된다는 뜻이었으리라.




피고인 심문은 짧게 이뤄졌다. 

거기에 더해 검사는 몇 가지 의견 진술을 했지만, 더 이상의 주장은 사실상 포기한 듯 했다. 

그 사실이 피고인 제출 증거와 전문가 의견보다 증명력에서 우위를 가지냐는 판사의 말에 명확히 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검사의 최종 구형은 금고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었다.

변호사 역시 증거불충분과 법리를 들어 무죄를 강력히 외쳤다.

나는 별도의 최후진술은 하지 않았다..




최종 판결일. 

전문가 의견에 근거해 피고인이 의사로서 최선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볼 이유가 없으며, 환자의 사망과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내용을 근거로 판사는 무죄를 선고했다.

검사가 제시한 증거가 범죄사실 입증에 부족할 뿐더러 법리적으로도 과실치’사‘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때는 검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마 그 기상천외한 동맥류를 내가 처음 본 것처럼, 그 판사도 증거와 법리 모두에 근거해 무죄를 줄 수 밖에 없는 사건을 재판정에 끌고 온 한심한 검사는 살면서 처음 봤으리라.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간단한 인사를 하고 법정을 나왔다.

기적이 일어난 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기소였으니까.


아마도 전문직이나 고위층의 유죄를 이끌어내면 가산점을 주는 검찰 내부 시스템과 실력없이 의욕만 앞선, 세상 모르는 어린 여검사의 조합이 빚어낸 일이었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나름 웃으며 회상하지만, 당시에는 살면서 가장 큰 짐을 진 기분이었다.




그때 의견서를 내 주신 이름 모를 교수님께는 정말로 감사하다.

선민의식과 철없는 만능감으로 잔뜩 뭉친 자칭 교수들이 의견서를 내 주는 지금 기소를 당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과실치사가 아닌 과실치상으로 기소를 당했거나. 고민 없는 판결을 남발하는 판사를 만났더라면(현 시대에 많다) 내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 일 이후, 나는 수술을 그만두었다. 

사실 병원장이 붙잡아 조금 더 있긴 했는데 그 당시의 일들이 떠올라서 도저히 전과 같은 실력을 발휘할 자신이 없었다.

이거 몇 년 이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살긴 했지만, 이런식으로 끝을 맞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입국식에서 다 같이 사진 찍던 날(술도 평생 가장 많이 먹은 날이다)

뒤섞인 필름 찾느라 날밤 새던 날

angio를 처음 배워 떨리는 손으로 경동맥에 카테터 꽂던 날

처음 드릴로 머리를 열던 날

11번 블레이드를잡고 Sylvian을 째고 들어가 클립을 찝어 보던 날

칼을 놓고 나오는 길에 머리를 스쳤던 수 많은 추억들..




당시 기억을 떠올려보면 모교 교수님들은 하나같이 스승님이라 불릴 만한 분이었다.

요즘은 펠로까지 해도 머리도 까고 endovascular도 하는 hybrid 써젼이 많지 않다고 하던데.

내 스승님들은 어수룩했던 1년차를 4년만에 어지간한 응급은 혼자 다룰 수 있는 꽤 괜찮은 써젼으로 만들어 냈다.

비록 지잡이라 불리는 학교지만 그들 이상의 스승은 팔도를 다 뒤져도 아마 찾기 힘들 것이다..




선배 병원에서 다시 봉직을 시작했고, 통증 진료를 배워 지금은 개원 10년차가 넘어간다.

이제 나는 더 이상 NS가 아니라, 유튜브 보고 낄낄대며 매출 걱정이나 하는 점빵 사장님일 뿐이다.


돈은 어느정도 벌었을지언정 가슴 한 군데 공허한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젊은 날의 열정은 참으로 덧없지만 어쩌면, 그것이 삶의 끝자락에 남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무기력한 점빵 사장님에게도 가운 휘날리던 화려한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책장 귀퉁이에 놓인 안지오 기계 앞 어색한 표정의 사진만이 알고 있을지도..



빛바래가는 사진과 함께

고향 변두리 어느 구멍가게 의원에서 어느덧 나도 인생의 끝을 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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