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초기는 중앙집권체제가 아닌 5부족 연맹 체제
즉, 우리가 생각하는 왕권의 나라가 아니고
부족을 다스리는 군장은 왕에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됨
주로 왕비는 비류나부에서 배출되었는데
고국천왕과 결혼한 우씨왕후는 연나부 출신임
어떻게 되었냐면
7대왕 차대왕이 심한 폭정을 함
> 연나부 출신의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죽이고 8대 신대왕을 옹립함
> 여기서 신대왕은 고국천왕의 아버지
그렇게 연나부의 후광으로
연나부 출신의 우씨왕후가 고국천왕과 결혼하게 됨.
이후 중국 후한과의 전쟁에서 연나부의 군사를 지원하는 등
우씨왕후는 탄탄하게 입지를 다져가게 되는데..
서기 197년 5월
고국천왕이 재위 19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됨
원래대로라면 모두에게 왕의 죽음을 알리고
장례를 준비해야하는데 우씨왕후는
왕이 죽은 그날 밤.
은밀하게 궁을 빠져나가 왕의 첫째 동생 고발기를 찾아감
??? 거긴 왜갔어요 ???
바로 고구려의 혼인 풍습인 형사취수혼
전쟁이 잦고 남성들의 수명이 짧았던 고대 사회의 특성에 따른 생존 방식인데
형제의 아내와 자식을 지켜주려는 목적도 있지만 사실상 남성 집안 중심의 혼인 풍습임
결혼을 하면 많은 지원금을 주는데
남편이 죽은 뒤 여성이 다른 집안과 결혼하면?
집안의 경제적 손실인 셈이니까.
그런데 우씨왕후는 이러한 남성 집안을 위한 풍속을
자신과 자신의 부족을 위해 역으로 이용함
우씨는 고국천왕의 첫째 동생 고발기에게 찾아가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중요)
왕위에 대해 이야기함
- 우씨왕후: 내가 도와줄게
- 고발기: ??? 어차피 다음 왕은 난데
발기 입장에서는 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니
왕의 생전 왕위를 논의하는 게 반역이 될 수 있고
한밤에 왕후가 자신을 찾는 것도 너무 의아했을듯
우씨왕후에게 단호박 먹이고
늦은밤 예의가 아니라며 면박까지 주는 발기
우씨왕후는 발기에게 왕위를 맡길 수 없다고 판단,
빠르게 둘째 동생 연우에게 감
그리고 발기와 다르게 예를 갖춰 우씨왕후를 맞이해준 연우
본인이 직접 맥적을 썰며 (평소 아랫사람이 하던 일)
“나는 궂은일까지 할 수 있다”라고 맥적 플러팅 시전함
그렇게 연우와 취수혼을 하기로 결심.
고국천왕의 죽음을 밝히고 왕위에 대해 이야기함
??: 빠르게 분위기 로맨스
라기보다는 이 또한 우씨왕후의 지략임
고국천왕의 유언이라고 꾸민 후 연우와 취수혼을 하게됨
그렇게 고구려 10대 왕이 된 산상왕
고발기가 왕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애초에 왕의 죽음을 밝히지 않고 왕위를 논한게 아닌가 싶음
결단력 미쳤다고 생각함..
나였으면 고민하다 끝났을 것 같음
+) 이후에 고발기가 이 사실들을 알고 대분노하는데
고발기=이수혁이라 캐해 기대중 (파트2에서 나올듯)
아무튼 우씨왕후의 선택으로 연우는 왕위에 오르고
연우는 우씨를 왕후로 삼음 = 왕후 2회차
그러나 우씨왕후의 발목을 잡은 것은 ‘임신’
7년 간 아이를 낳지 못하자 산상왕은 후녀를 들이려 하고
결국 후녀의 임신 소식까지 듣게 됨.
이 시대에는 왕권을 물려받을 아들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우씨왕후의 입지는 흔들리는 것이 정상.
그러나
산상왕과의 개큰딜 성공
증여를 후하게 받고 후녀와 아들을 해하지 않기로 함
결국 산상왕의 후녀가 아들을 낳았으나
우씨 왕후와 연나부는 이미 세력이 탄탄
그렇게 굳건한 권력을 계속 유지하던 중
산상왕이 세상을 떠나는데
그럼 이제 고구려 11대왕은 산산왕과 후녀의 아들인 동천왕임
이렇게 우씨왕후 권력의 끝이 보이는구나 싶었는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기선제압 현장
우씨왕후 걱정은 안해도 되겠어요..
55년 간 최고 권력자로
그 어떤 왕보다 더 오래 제대로 권력을 누림
조선시대 선비들은 유교사상 기준, 우씨를 금기를 어긴 사악한 여성으로 평했지만
현시대에는 ‘치밀하고 냉정한 정치적으로 뛰어난 여성’으로 평가됨
<마지막까지 관례 씹어 먹는 우씨왕후>
관례 그게 뭔데.. 내 묘자리 내가 결정함ㅇㅇ
* 내용/이미지 출처: tvN 벌거벗은 한국사, TVING 우씨왕후
+) 산상왕 부터는 그림이 많은 걸 보니 우씨왕후 파트2는 아마 산상왕 즉위 직후까지만 그려질듯?
일단 고발기의 활약 개큰기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