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교회 한경직목사
영락교회가 서청과 밀접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대표적인 기록으로는 한경직 목사 회고록이 있다. 김병희 목사가 1982년 발간한 <한경직 목사>(규장문화사)에서,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서청을 조직했다고 말한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요.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 되어 조직을 했시요.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요.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그들은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게 싱거웠는지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칼이나 창으로 찔러죽였다. 밟아 죽이고 물에 빠트려 죽였다. 목을 잘라 죽이고 허리도 잘라 죽였다. 폭탄을 터트려 죽이고 차바퀴로 치여 죽였다. 독약을 먹여 죽이고 껍데기를 벗겨 죽였다. 굶겨 죽이고 절벽에서 떨어트려 죽였다. 구덩이를 파게 하고 생매장도 했다. 나무에 목매달아 죽이고 나무에 묶어 놓고 죽였다.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 굴 입구에 연기를 피워 굴에 피신한 주민들을 질식사시킨 경우도 흔했다.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뺨을 때리도록 강요했다. 그러다 히히덕 거리며 총으로 쏴 죽였다. 여자를 강간한 뒤 죽이는 건 부지기수였다. 여자의 성기에 총구를 꽂기도 했다. 젊은 남녀가 성관계를 맺도록 강요하며 사살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보는 자리에서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나신으로 성관계를 맺도록 강요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낄낄거리며 총으로 난사했다.”
- 4.3 증언
무엇보다 당시 목회자들도 집단학살에 개입했다는 일각의 목소리는 충격적이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tbs교통방송 김어준의 뉴스공장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민간인 학살에서 반드시 있는 게 선별 절차였는데 손가락질을 해서 죽이는 쪽과 살리는 쪽을 선별했다. 그 역할을 목사님들이 직접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제주에서의 학살과 관련해 영락교회는 침묵하고 있다. 영락교회는 이와 관련해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이날 열린 주일예배에서 김운성 영락교회 위임목사는 설교를 통해 “영락의 성도들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원합니다”라고 호소했지만, 영락교회가 지은 74년 전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성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