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의 부고로 (조부모 삼촌 부모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셔서) 젊은나이에 재산을 물려받은 전형필이 소유한 논은 800만 평(4만 마지기)이 넘었으며
당시 논 한마지가 50원이었으니. 4만 마지기면 200만 원이며 한옥으로 2000채
값어치는 지금으로 보면 6천억원 정도
조선의 3대 거부로 그 당시에 우스갯 소리로 서울의 북쪽 땅은 모두 전형필의 땅이라는 말도 있었다고 함
전형필은 평생의 스승 독립운동가 오세창의
“동서고금에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고,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다”
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문화재를 감식하는 눈을 기르게 됨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판매자가 천 원이라고 했지만 귀한 물건은 제 값을 치러야 한다며
당시 집 열 채 값인 만 원을 주고 천 원은 수고비로 주며 사들였고
한국전쟁 때는 피난갈 당시 품에 껴안은 채 다녔고 밤에는 항상 베개 밑에다 두며 지켜냈음
1959년 엄청난 재정 사고가 발생, 그 빚을 갚기 위해 가족들까지도 극심한 가난에 시달림
서화와 도자기 몇 점만 팔았어도 해결하고도 남았겠지만 전형필은 끝까지 자신의 문화재 수장품들을 지켜냄
이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서 재단의 빚을 모두 갚은 후 급성 신우염으로 쓰러져서 1962년에 만 56세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