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아주는 여자>는 조폭 출신 사업가 서지환(엄태구)이 키즈 크리에이터 고은하(한선화)와 연애하는 얘기다. <조폭 마누라> <가문의 영광> 등 2000년대 초반 한국 조폭 코미디를 연상케 하는 설정이다. 완성도보다는 캐릭터의 매력으로 승부가 나는 드라마인데, 신선한 캐스팅 덕에 눈을 떼기 어렵다.
지환의 회사 ‘목마른 사슴’은 전과자를 대거 고용하고 있다. 그런데 하필 아동 식품 분야에 진출하는 바람에 소비자의 선입견을 타파하는 데 애를 먹는다. 과거 조직 내 경쟁자였던 고양희(임철수)가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지환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암흑가 큰손 서태평(김뢰하)마저 감옥에서 출소하면서 일은 더 꼬인다. 그런데 막상 드라마에서는 어두운 기운을 느낄 수 없다. 키즈 크리에이터 고은하가 몰고 다니는 알록달록하고 유아적인 미장센, 천진난만한 세계관 덕분이다.
고은하는 어린 시절 자신과 놀아준 이웃집 오빠 ‘현우’를 수십 년째 찾아다닌다. 그 시절 기억 때문에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은하는 유튜브 콘텐츠 촬영용 경찰복을 입고 클럽에 갔다가 깡패들의 싸움을 중재하게 되고, 그 바람에 서지환과 얽힌다. ‘현우’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려서 지환을 감시하는 검찰 장현우(권율)와도 친해진다. 유년기 인연에 집착하고, 회사에서 잘리는 바람에 갈 곳이 없어지자 전과자들이 득실대는 지환의 집에 눌러앉고, 다 큰 남자들을 어린아이처럼 대하고, 마카롱 색 의상을 입고 다니는 성인 여자라니, 현실에서 만나면 깡패보다 이쪽이 무서울 것 같다. 하지만 그 덕에 드라마는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른 모든 남자를 패줄 수 있을 만큼 강하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헌신적인 남자란, 인간 사회에서 오랜 세월 신체로나 권력으로나 열세였던 여자들에게 버리기 힘든 판타지다. 가치 판단이 아니라 현상을 얘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놀아주는 여자>는 이 판타지를 정통으로 공략한다.
이야기와 연출은 허술한 대목이 많다. 서지환과 고은하가 자꾸 부딪치는 초반부는 시공이 찌그러진 것처럼 연결이 어긋나곤 한다. 주인공들이 냉동 창고에 갇히거나 같이 넘어지는 바람에 포옹하게 되는 장면, 부하들이 작당해 다 같이 여행을 떠나는 장면처럼 상투적인 대목도 많다. 지환이 조폭 시절 여자를 구해준 에피소드, 그의 직원들이 안타깝게 전과자가 된 사연 등을 소개하며 비난의 여지를 누그러뜨리긴 하지만 그걸로 이 소재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고민도 남는다. 이 작품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다른 조폭들에게만 무력을 쓰는 착한(?) 깡패가 존재할 수 있다고, 일단은 속아주어야 한다. 다행히 그게 어렵지는 않다. 배우들 덕이다.
엄태구는 누아르에서는 검증된 배우지만 로맨틱 코미디에서는 ‘언더독’에 가깝다. 그의 선 굵은 얼굴과 강한 눈매, 걸쭉하고 먹먹한 발성은 작품에 즉각적이고 불온한 긴장감을 유발하는 용도로 자주 쓰였다. 분명 사람을 끌긴 하는데 흔치 않은 타입이라 해석을 한 번 더 고민하게 되는, 꽤 까다로운 성질의 매력이다. 그의 컬트적인 매력이 이 느슨한 드라마에 재미있는 질감을 부여한다.
30대 중반까지 여자에게 관심이 없던 서지환은 고은하를 만나고 나서 난생처음 감정의 동요를 겪는다. 고은하의 유튜브 채널을 훔쳐보며 히죽대거나, 술에 취해 은하 앞에서 귀여운 주정을 부리고 후회하는 식이다. 이런 장면에서 서지환 혹은 엄태구의 쑥스러움은 사랑에 빠진 ‘형님’을 연기하기 위한 치밀한 계산인지, 배우 자신이 이 연기를 민망해하고 있는 것인지, 이 배우의 기존 연기를 지켜봐온 팬들의 선입견 때문에 그리 보이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캐릭터를 실감 나게 해준다. 물론 이 모험적인 캐스팅은 한선화의 밝고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균형을 잡아주기에 가능한 것이다.
고은하는 한선화의 대표작 <술꾼도시여자들> 시리즈를 자주 상기시킨다. “제가 한때 술꾼이었거든요”라는 대사나, 은하가 서지환과 부하들을 술로 평정하는 장면은 전작의 노골적인 오마주다. 한지연과 고은하 모두 속없는 얼굴을 하고 다니지만 시쳇말로 ‘딜이 안 통하는’ 외유내강 캐릭터다. 한편으로 한선화에게는 저 알파 메일 판타지의 ‘보호받는 여성’ 이미지에 부합하는 여리고 순수하면서 성숙한 느낌이 있다. <술꾼도시여자들>의 한지연이 그 이미지를 삶의 도구로 능숙하게 활용하는 여자라면 <놀아주는 여자>의 고은하는 자신의 여성성을 의식하지 않는 우직한 타입이다. 어느 쪽이든 상대를 자기 궤도 안으로 끌어들이는 강한 에너지가 있는 인물들이다. 그 덕에 은하가 지환 무리와 합숙하는 장면이 ‘백설 공주와 난쟁이들’처럼 보일 정도고, 전직 조폭과의 열애라는 위험한 설정을 로맨틱 코미디로 받아들이기도 수월해진다.
<놀아주는 여자>는 이제 종방을 앞두고 있다. 고은하의 신변이 위험해지면서 서지환의 갱생 다짐이 시험에 들고 한바탕 멜로드라마가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예쁘고 세련되고 무해하여 누구나 좋아하는 남자 말고, 마이너한 매력에 끌리는 관객이라면 이 드라마를 완주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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