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인천 최고의 투수였던 김상기
그는 인천고 재학 중이던 1976~1978년
봉황대기 4강, 대통령배 4강 그리고 황금사자기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고
졸업 후 인하대에 79학번으로 진학하게 된다.
81년에 우완투수 오영일과 좌우 원투펀치를 이루며
인하대의 창단 첫 우승을 일궈내었고
인하대는 이듬해에 2개 대회 우승과 2개 대회 준우승을 기록하며
대학 야구의 강자가 되었다.
이 중심엔 좌완 에이스 김상기가 있었다.
그는 변화구를 주무기로 완투능력이 뛰어났던 선수였으며 최종 엔트리에는 들지 못하였지만
82년 세계 야구선수권대회 27인 엔트리에 선정 될 만큼 뛰어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82년 동아대와의 백호기 결승에서 혼자 게임을 책임지며 대회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가 졸업반이던 1982년 프로야구가 창단이 되었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인천의 삼미는 최약체였다.
1983년 직전 해 대학 무대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인하대의
주축 선수들이 졸업하기에 인천 야구팬들은 큰 기대를 가졌고
인하대의 에이스였던 김상기는 인천고 시절부터 쭉 합을 맞춰 오던 김진우와 함께
삼미의 1차 지명을 받고 삼미에 입단하게 된다.
아마 시절 최고의 모습을 보였던 김상기는 프로 첫해
2승 3패 5.74라는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을 거두었고
그의 배터리였던 김진우는 15홈런을 치며 삼미 돌풍에 기여하였고 주전을 차지하게 된다.
1986년까지 꽤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김진우는 그해 신인 포수에게 자리를 뺏기게 되는데
그 신인이 바로 고교-대학 직속 후배인 김동기였다.
1986년 7월 25일 청보와 OB와의 경기에서 김상기가 구원으로 등판하게 되는데
1986년 7월 25일
KBO 최초로 형제가 배터리를 이룬 날
3회말 김상기가 1이닝 동안 구원 등판을 하며
자신의 동생과 함께 프로무대에서 배터리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2024년 현재까지 이 날 이후로 나온적이 없는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이후 1987시즌을 끝으로 형 김상기는 은퇴하여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하였고
동생인 김동기는 청보에서 현대까지 약 10년간 인천의 안방마님을 지키며
인천 야구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