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x.com/damnfinecoffee/status/1813149407774450006
궁금해서 기사 찾아봄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6/0002314706?sid=103
그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세계를 보는 아이였다. 매끈한 완성품에 둘러싸인 곳에서 직조되기 이전의 세상을 봤다. 바이올린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우아하게 굴곡진 바이올린의 모양에 반해 “이 악기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겨우 30대 초반, 크레모나 악기 제작자 협회의 최연소 회원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0년 정도다. 미국 NYT는 한국인 바이올린 제작자 안아영(32) 씨를 “바이올린 제작계의 떠오르는 스타”라고 표현했다.
(중략)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 보람과 성취를 느끼며 전공을 결심, 서울의 한 예고까지 진학했지만, ‘악기 제작자’라는 직업에 호기심을 가진 것은 그보다 한참 전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쯤 동네에 악기상이 하나 생겼는데, 수많은 악기가 쫙 펼쳐져 있어 뭔가 신비로워 보였다”고 회상했다.
그날부터 소녀의 놀이터는 동네의 악기사였다. 또래 친구들은 굳이 관심을 두지 않는 곳이었다. 학교를 마치고는 당연한 듯 들렀고, 주말에도 매일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눈치도 없이 사장님이 짜장면을 시켜주면 열심히 먹었고, 집에도 안 가고 종일 악기를 구경했다”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중략)
설상가상 예고에 진학하니 악기사에 갈 일은 더 많아졌다. 심지어 평택과 달리 서울은 다양한 악기사들이 훨씬 많아 그에겐 천국이나 다름 없었다. 결국 고등학교 2학년께 악기를 만드는 유학을 가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안씨는 “혈혈단신 떠났지만, 미성년자는 악기 제작 학교에 입학할 수 없어 미국 시카고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먼저 이수했다”며 “학과 과정이 만만치 않아 도서관에서 새벽까지 공부하다 잠들기 일쑤였다”고 돌아봤다. 미국에서 3년 간 공부한 그는 지난 2011년 크레모나의 국제 바이올린 제작 학교(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스쿨)에 결국 입학했다.
(중략)
학교 졸업 후엔 현지 공방에서 3년 간 일하다 2020년 크레모나에서 자신의 예명을 따 ‘아리에티 현악(Arietti String)’이라는 공방을 열었다. 학생 시절부터 졸업 이후까지 그는 콩쿠르도 숱하게 휩쓸었다. 피소네 현악기 제작 콩쿠르, 로마 국제 바이올린 제작 콩쿠르 등에서 입상하며 일찌감치 현지의 유명인사가 됐다. 그는 “콩쿠르엔 전 세계 제작자들이 모이다 보니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보며 자극도 된다”며 “콩쿠르를 통해 1차 검증을 받으면 제작자로서의 커리어와 판매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중략)
안씨의 바이올린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전 세계 곳곳에서 그의 악기를 만나기 위해 모인다. 안씨의 악기는 현재 2000만원~3000만원 정도. 그는 “악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최종 목표는 좋은 소리를 찾는 것인데 무엇보다 연주자가 편하게 느끼는 소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의 바이올린은 기성품이 아니다. 솔리스트인지 오케스트라 단원인지 역할에 따라 다른 악기가 필요하기에 제작 전 연주자와의 충분한 대화를 통해 ‘맞춤형 악기’를 만들어간다.
(중략)
악기를 완성한 후 가장 마지막 단계는 악기 안쪽에 불도장으로 그의 이름(Ayoung An)을 찍는 것이다. 이를 제작자들은 ‘세례’ 과정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악기 제작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것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언젠가 수백년의 시간이 흘러도 제가 만든 악기와 이름이 남겨지고 누군가는 기억해준다는 것에 (감정이) 벅차 오르더라고요. 악기를 통해 소통할 수 있고, 이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저를 기억한다는 믿음이 있어 매일의 최선을 다하게 돼요. 그렇게 하루, 일주일, 한 해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https://www.nytimes.com/2024/04/04/arts/violin-italy-antonio-stradivari-ayoung-an.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