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곤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사무총장 인터뷰
K팝, K드라마, 한국 영화, 웹툰. 세계 어디에 내놔도 경쟁력 있는 한국의 고유 콘텐츠다. 통칭 문화예술로 묶이며 반도체, 자동차와 함께 이미 한국 자본시장을 이끄는 주요 ‘산업’으로도 자리매김했다. 적어도 해당 분야에서는 ‘한국이 곧 글로벌 스탠더드(국제표준)’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처럼 빛나는 성과 외에도 이들 영역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해당 영역의 성공은 ‘사람을 갈아서 만들었다’는 오명이 붙어 다닌다는 점이다.
지난해 만화 <검정고무신>을 그린 이우영 작가의 죽음은 업계에 만연한 불편한 진실을 알렸다. 이어 유사한 불공정 사례가 웹툰, 드라마, 음악 등 한국이 자랑하는 문화예술 전반에 퍼져 있다는 폭로도 나왔다. 그럼에도 1년 넘도록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았다. 다양한 분야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이른바 ‘이우영 3법’을 통과시켜줄 것을 촉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 7월 9일 서울 여의도에서 송창곤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사무총장을 만났다. 그는 방송연기자들이 겪는 불공정 사례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했다. 이우영은 만화, 웹툰 업계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예술산업 곳곳에 퍼져 있었다.
-방송연기자들이 겪는 불공정은 어떤 것들인가.
“기본적으로 문서화되지 않는 불공정 계약 조항이 너무 많다. 심지어 촬영이 끝나고 계약을 하는 예도 있다. 소속사가 없는 신인이나 조·단역급 연기자는 계약하자고 먼저 말하지도 못한다.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은 연기자의 열망을 볼모로 지불해야 할 정당한 대가를 후려치는 것이다. ‘우리 다음에는 안 볼 거냐’는 식의 은근한 협박까지 곁들인다. 노조에 접수된 민원 중에는 한 연기자가 대사 몇 마디를 위해 매주 토요일 총 7주를 경남 통영까지 가야 했던 사례도 있다. 제작진이 매주 불러 대기시켜놓고 촬영은 차일피일 미룬 것이다. 숙식비, 교통비 등 비용을 썼고 그 시간 동안 다른 일도 하지 못했는데 출연료는 촬영 한 번 했다고 딱 1회분만 받았다. 특히 힘없는 신인, 조·단역 연기자를 우롱하는 이러한 행태가 만연해 있다.”
-드라마 촬영이 끝났는데도 출연료를 지급하지 않는 사례도 있나.
“2022~2023년 OTT 열풍을 타고 사전제작하는 드라마가 많아지면서 본격적으로 불거진 문제다. 일부 제작사들이 출연료 지급을 드라마 편성 시점으로 바꿨다. OTT 열풍이 불 때야 모르지만 지금처럼 사그라들면 드라마 편성 자체가 어려워진다. 결국 연기자들은 출연료를 받지 못하고 무작정 기다리게 됐다. 현재 30여 편에 가까운 드라마가 미편성으로 남아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연쇄적으로 터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출연료는 방영, 편성이 아닌 촬영을 기준으로 지급해야 한다’고 말해도 안 된다. 연기자도 생활을 꾸려가야 하는 직업인이다. 정당한 방식으로 노동 대가를 지급하는 것은 상식의 문제 아닌가.”
-출연료를 바로 주지 않는다는 게 납득하기 어려운데.
“심지어 촬영 후 편집됐다고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5회차 분량 촬영을 했는데 실제 방송에는 편집돼 4회차밖에 나오지 않는 경우다. 방송출연표준계약서에는 촬영분으로 계약한 금액에 대해서는 전액 지급하는 것으로 돼 있다. 현실은 다르다. 5회차 촬영을 해도 편집된 분량은 빼고 4회차만 주는 식이다. 표준계약서는 권고사항이고, 수정 및 변경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계약서에 ‘전액 지급한다’는 내용을 빼버린다. 2021년 KBS 드라마 <미스 몬테크리스토>, 2023년 KBS 드라마 <우아한 제국>이 대표적 사례다. 악용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일일 드라마 촬영을 하면 보통 120부작이다. 이때는 대본 기준으로 출연료 지급 계약을 하자고 한다. 그런데 120부작으로 알고 촬영장에 갔더니 대본은 100회차만 나온다. 대본을 쪼개서 120부작으로 만들고, 출연료는 100회차만 지급하는 것이다. 출연료 지급의 명확한 기준이 없다 보니 제작사나 방송국이 유리한 방향으로 온갖 형태의 계약이 나온다.”
-부당한 조건이면 출연을 거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직도 연기자 중에는 작품만 보는 사람이 많다. 근로조건 등의 환경보다 창작자로서의 욕구가 더 강한 것이다. 주연급 연기자가 촬영 중 부상당했는데 투혼을 발휘해 무사히 마쳤다는 이야기가 여전히 기사로 나온다. 부상당했으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지, 촬영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부상당할 수 있는 위험한 환경을 만들고 사고가 나면 미담으로 포장하는 것은 결국 제작사, 방송사다.”
-플랫폼인 방송국은 제작사의 부당행위를 제지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방송사가 자회사로 스튜디오를 설립해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방송사와 제작사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에 공정한 계약은 시작부터 막힌다. 모회사-자회사 관계가 아니더라도 방송사가 제작사를 통제하는 것은 어렵다. 문제를 제기하면 서로 책임을 미루기 일쑤다. 게다가 연기자 중에서는 노동환경 개선보다는 작품을 위해 열악한 조건을 견디고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현장 분위기마저 이러하니 법을 통한 강제적 이행 없이 업계의 불공정, 부당 노동 행태가 자발적으로 시정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소속사가 있다면 상황이 좀 나아지나.
“연기자 소속사가 제작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3자 계약이 업계에 만연해 있다. 쉽게 말해, 연기자가 소속사와 전속계약을 체결하고, 소속사가 제작사나 방송국과 출연 계약을 맺는다. 이 경우 연기자는 소속사가 제작사나 방송국과 어떤 형태의 계약을 했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계속 논란이 되는 정산 문제도 여기서 출발한다. 뒤늦게 소속사가 부당한 계약을 한 것을 알고 계약 해지하려 해도 이게 단순 ‘분쟁의 소지’인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상당한 이유’인지 법적으로 따져야 한다. 결국 합의가 최선이 되는 식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있지 않나. 신고하면 안 되나.
“문체부는 문화, 체육, 관광 등의 진흥을 위한 기관이지, 그 안의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곳은 아닌 것 같다. 과거에는 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인 신문고’, 콘텐츠진흥원의 ‘공정상생센터’ 등을 통해 계약 등의 불공정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면 업계의 불공정 관행을 잘 아는 같은 예술 업계 종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된 사례가 많았다. 그런데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예술인권리보장법) 시행 이후 법에 따라 신고를 하면 문체부에 이관된다. 그 안에서 공무원들이 어떤 절차를 거쳐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조치는 무엇이라고 보나.
“표준계약서만이라도 100% 이행하도록 해야 한다. 표준전속계약서는 거의 예외 없이 사용된다. 그런데 여전히 방송출연표준계약서는 온갖 방법으로 지키지 않는다. 특수한 상황에는 표준계약서를 수정 및 변경할 수 있다고 여지를 뒀기 때문이다. 대체 그 특수한 상황이 뭔가. 제작사나 방송국은 그 특수한 상황을 이용해 전부 빠져나간다. 1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방송출연표준계약서를 단서조항까지 100% 다 지킨 계약서를 딱 두 번 봤다. 가장 기본이 되는 표준계약서가 이런 상황인데 무슨 수로 연기자 권리를 지킬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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