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물이 하나 도착했다. 비슷한 또래의 사촌이 보낸 것이다. 우편물을 뜯어보니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들어있다. 대여섯 살 때의 나와 사촌이 유원지에서 찍은 사진인 듯하다. 동봉된 메모를 보니 사촌이 짐을 정리하다 찾아내, 반가운 마음에 보냈다고 했다.
기억에 전혀 없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마침 때맞게 사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진봤지? 너 그 때, 집 잃어 버릴 뻔 했잖아. 난 아직 기억에 생생한데.”
하지만 나에게는 그 유원지에 갔던 기억은 전혀 없다. 기억이 없으니 할 말도 없다. 결국 “그랬던가?”하고 건성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미아가 될 뻔 한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조작된 사진으로도 얼마든지 변하는 우리의 기억
며칠 후 사촌이 집으로 찾아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사촌이 한마디 한다. “그 때 너 미아 될 뻔 했던 기억 살아났어?” 그러고 보니 내가 미아가 될 뻔한 적이 분명 있었다. 기억을 되살린 나는 미아가 될 뻔했던 때의 경험을 생생하게 이야기했다.
실감나게 미아가 될 뻔했던 이야기를 하고 나니, 사촌이 한 마디 한다. 그 사진은 자기가 장난으로 만든 사진이었고, 미아가 될 뻔한 이야기도 꾸며낸 이야기였으며, 그 유원지에 간 적도 없었다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겪지도 않은 경험을 마치 겪었던 듯이 기억해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있다.
https://img.theqoo.net/TQpBM
다음과 같은 Wade와 동료들의 실험(2002)을 살펴보자. 이 사진은 위의 왼쪽 그림과 같은 흔히 있을 수 있는 가족사진을 이용했다. 사진은 물론 피험자가 아니라 피험자의 가족들이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을 오른쪽의 열기구를 타고 있는 진기한 경험의 사진으로 합성했다.물론 이것이 합성된 사진이라는 것을 피험자 본인은 전혀 모른다. 또한 이들이 열기구를 탄 경험이 없다는 것은 사전에 확인되었다.
50%는 열기구를 탄 적이 있다고 응답
실험에서는 이 사진을 피험자들에게 보여주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풍선을 탔을 때 보았거나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두 번에 걸친 인터뷰에서 학생들의 50%는 풍선을 탔던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때 겪었던 일을 생생하게 이야기했다. 한 학생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내가 6학년 때의 일이라고 대단히 확신합니다. 음~ 밑에서 어머니가 사진을 찍고 있었던 것을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기억은 이처럼 암시에 의하여 변하기 쉽고 재구축되기도 한다. 따라서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목격자의 증언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은 사회심리학에서는 일찌감치 입증된 사실이다.
https://img.theqoo.net/zXZiz
기억이 얼마나 가변적인 것인가를 보여주는 실험은 많다. Loftus의 실험을 보다 정교하게 디자인한 Grinley(2002)의 실험을 살펴보자.
어린 시절 디즈니랜드에 가본 적이 있다고 한 학생들에게 사람들이 디즈니랜드를 구경하는 장면을 찍은 광고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사진 가운데에는 한 아이가 벅스 버니의 손을 잡고 있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험자들에게 어린 시절 디즈니랜드에서 벅스버니를 만났던 장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해보라고 했다. 실험자 가운데 62%가 벅스 버니와 악수를 했다고 말했다. 45%는 벅스 버니와 포옹을 했다고 기억했다. 벅스 버니의 귀나 꼬리를 만져보았다고 기억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한 학생은 벅스 버니에게 당근을 주었던 것을 기억하기도 했다.
하지만 디즈니랜드에는 벅스 버니가 없다. 있었던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 벅스 버니는 디즈니의 라이벌격인 워너 브라더스의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디즈니랜드에서는 절대로 만나 볼 수 없는 캐릭터가 벅스버니인 것이다. 물론 그 광고 사진은 가짜였고, 그 사진으로 비롯된 피험자들의 기억 역시 가짜였다.
거짓 기억 증후군(False Memory Syndrome)
이처럼 암시에 의하여 없었던 기억도 되살려내는 것이 사람이다. 이런 까닭에 거짓기억 증후군(False Memory Syndrome)이 문제가 된다. 거짓 기억 증후군이란 정신 치료나 상담을 받던 사람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를 기억해 내게 되는 현상이다.
이런 기억을 떠올리고 성적 학대를 받았다고 부모를 고소했던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여성들의 기억 가운데 상당수가 정신치료 중의 암시가 원인이 되었던 경우가 많아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논란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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