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인기가수 금호동
당시 미남+미성으로 유명했다고
작곡가 박춘석
대표작
남진 '가슴 아프게', 패티김 '초우', 은방울자매 '마포종점', 나훈아 '물레방아 도는데' 등
1965년 가수 금호동이 박춘석과 자신이 동성 연인이었다고 폭로했다.
1965년 1월 금호동은 공전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도중 돌연 은퇴를 발표했는데, 처음에는 '깡패와 팬들의 성화로 가요계를 은퇴한다'고 설명하고 고향 광주로 내려가서 은둔했다.
그러나 서대문경찰서가 현장검증을 위해 금호동을 부르자 더 이상 감추지 못하고 ‘3년 전부터 박춘석과 동성연애를 했다. 그 관계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해 가요계를 은퇴하는 것이다.’고 밝혔다. 당시 금호동의 얼굴에는 손톱자국이 나 있었는데 이 손톱자국을 깡패에게 맞아 생긴 것이라고 둘러댔다가 이후 박춘석이 저지른 것이라고 정정했다.
박춘석은 이 소문에 대해서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니라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리고 금호동의 은퇴 선언 이유는 ‘동양방송 개국 때 10대 가수로 뽑히지 못해 홧김에 그만두겠다고 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금호동의 얼굴 상처는 1964년 12월 28일 금호동이 박춘석의 자택으로 찾아와 그만두겠다고 말해 화가 나 때리던 도중에 생긴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금호동은 한국연예협회에 의해 제명당했고 박춘석은 근신처분을 받았다.
당시 사회상 탓에 수사나 처벌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당시 경찰은 둘의 일은 경찰이 관계할 일이 아니라며 금호동을 돌려보냈다.
당시 연예협회가 조사 결과 사실무근이라는 보도를 내기는 했지만 실제로 아니었는지는 불명이다. 금호동은 당시 이 사실을 밝히며 기자에게 절대 비밀을 말하지 말아달라며 돈을 건네기도 했는데, 만약 이것이 거짓이라면 굳이 비밀을 보장해달라는 말을 할 이유가 없기는 하다.
사건 이후 금호동은 1년여 간 휴식을 가진 후 제명이 풀리자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을 하다가 67년에는 다시 앨범을 내는 등 재기하려 노력했으나 그후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1972년 가수협회회장 선거에 낙선하자 가수생활을 그만뒀다. 그 후 유부녀와의 간통사건에 휘말려 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결혼해 아들을 둔 것을 보면 금호동은 동성애자는 아니었고 이성애자 혹은 양성애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춘석은 가수 백일희를 무척 사모하여 백일희가 미국으로 떠난 뒤 실망하여 독신을 고집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가 동성애자였는지는 불명이다.
당시 기사자료
둘다 사망한 상태라 진실은 아무도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