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후하다. 애민(愛民)군주, 개방과 개혁을 추진한 지도자, 근대의 문을 열고자 했던 왕 등으로 평가받으며 지금까지도 정치인의 표상처럼 수용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조가 48세라는 이른 나이로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남인과 함께 개혁정치를 이끌고 나갔다면 조선은 근대적 군주국가로 발돋움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다.
박현모 여주대 교수는 “조선의 망국을 정조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은 다소 무리한 이야기지만, 정조에 대해 지나치게 포장된 이미지가 마치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①시민 계급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18세기는 절대군주의 시대였다. 루이 14세, 프리드리히 대왕, 건륭제 등이 나왔고, 조선도 숙종-영조-정조가 이전보다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 정조는 군신공치(군주와 신하가 함께 다스림)의 원칙을 깨고 초월적 지위에 서고자 했다.
②세도정치의 빌미 제공
이는 자신이 재위 초부터 천명해온 '우현좌척(인재를 가까이하고 외척을 멀리한다)'이라는 독트린을 뒤집은 것이다. 결국 순조 시대에 김조순 세력은 권력을 장악했다. 이런 이유로 19세기 조선 정치를 후퇴시킨 세도정치의 일정 책임은 정조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③개방적 군주? 주자성리학 신봉자!
정조는 서양의 문물에 관심이 많았으며, 성리학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조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정조가 주자와 송시열의 학문만을 정학(正學)으로 존숭했으며, 도리어 성리학적 세계를 공고히 하려고 노력했다고 지적한다.
한편 문체반정을 정치적 포석으로써 보는 견해도 있다. 박현모 여주대 교수는 "정조가 중용한 남인이 서학 수용 문제로 비판받았기 때문에 노론의 문체를 문제 삼아 양쪽의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④내로남불
정조는 신하들에게 사를 버리고 공을 좇으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를 실천하지 못하고 불법적이고 자의적인 경우가 종종 나타났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은언군 문제다.
그는 1794년 이복동생인 은언군을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불러 창덕궁 북쪽에 머물게 했고, 만나기도 했다. 신하들이 비판하자 그는 "이런 모습을 익숙하게 해 장차 아무도 거론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엄포를 놓고나 이에 대한 상소를 일절 내지 못하게 금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처럼 정조는 직언하는 신하가 없다고 한탄하면서도 자신이 민감하게 여기는 문제에 대해 상소하면 '금령'으로 막아버렸다. 박 교수는 "이런 정조의 정치는 언론 전반을 무기력하게 만들었으며, 재위 후반에는 대다수 관료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건설적인 비판이나 제안이 나오지 않았다"며 "세도정치기에는 약화된 언관들이 외척 세도가들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0976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