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독일 이민자들에 대한 기사 시리즈인데, 여성 노동자들이 어떻게 자기 권리를 찾았고 또다른 남성 노동자들과 연대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 근래 한국에서 벌어지는 남녀갈등에 시사하는 바가 있는 기사라고 생각해서 가지고 와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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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70년대부터 보훔에 남아 있던 한인 중에는 간호사도 있었다. 1950년대부터 1976년까지 약 11,000명의 한국인 간호사가 독일에 왔다. 파독 광부보다 간호사 숫자가 더 많다는 것도 나에게는 새로운 지식이었다. 이들은 광부와 다르게 독일 전역으로 보내졌다. 독일에 온 대부분의 이주노동자 집단은 남성 중심이었다. 하지만 한국계 이민 1세대의 중심에는 여성들이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 독일 정부와 맞선 한인 간호사들
‘이민자 국가’ 독일 사회의 경험② 자신의 권리를 찾은 여성 ‘손님노동자’ (上)
자신의 권리를 찾은 여성 ‘손님노동자’ (上)
독립적인 삶을 꾸리며 해방감을 느꼈던 여성 노동자들
성명서는 서독 정부에 전해졌고, 이주 한인 간호사들은 1978년 3월 뮌스터시에서 연방 내무부와 노동부의 대표, 그리고 뮌스터시가 위치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내무부 대표가 참여하는 공청회를 조직했다. 공청회에서 한국인 이주 간호사들은 이곳에 계속해서 머무를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다. 결국 같은 해 6월, 서독 상원은 간호사들이 계속해서 계약을 연장하고 독일에 머물 수 있도록 법을 수정했다.
타쯔의 기사가 소개하고 있는 간호사의 사연 중에는 독일에 살면서 스스로 돈을 벌 수 있게 되고 독립적인 삶을 꾸리게 되면서 느꼈던 해방감을 표현한 것도 있다. 이런 해방감은 기사뿐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가 담긴 다양한 글에서 나타난다. 한인 간호사들이 독일 사회에서 느꼈던 해방감과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은 나에게는 새로운 것이었다. 그들과 성별이 다른 나는 독일에서 한 번도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아마 내가 한국 사회에서 억압받고 살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다.
한인 이주 간호사들은 독일에서 돈을 벌고, 자전거를 배우고, 운전 면허를 따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이혼을 하기도 하고, 교육을 통해 새로운 직장을 얻기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갔다. 이들은 많은 경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삶을 스스로 쟁취했다. 소설 『눈부신 안부』 속의 선자의 경우, 광부였던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지만 본인은 독일에 남기를 원했다. 그는 이혼하고 독일에서 홀로 자식을 키웠다.
저임금과 차별대우에 ‘파업’으로 맞선 이주여성노동자들
‘이민자 국가’ 독일 사회의 경험② 자신의 권리를 찾은 여성 ‘손님노동자’(中)
이주여성 노동자 파업, ‘시급 인상‘과 ‘저강도 노동 그룹 분류 폐지‘ 요구
독일 남성 숙련공들이 시위에 연대, 사측은 그제야 협상 나서
독일에서의 생활이 장기화되자, 이주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받는 대우가 부당하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1973년 자동차 부품업체 피어부르크에서 일하던 여성 이주노동자들은 기업이 언제 까지나 이주노동자를 착취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들은 여성 이주노동자 또한 자신의 삶을 위해 능동적으로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줬다.
기업은 이주노동자에게 저임금을 주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사측은 가을에 300명의 새로운 여성 이주노동자를 투입해, 장기간 근무하던 여성 노동자를 대체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사측은 이들의 요구를 무시했고, 시간이 지나면 정치적 조직력을 갖고 있지 않은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포기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의 예상과 다르게, 여성 이주노동자들은 시위의 동력을 잃지 않았다. 점차 독일인 남성 숙련공들도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독일 남성 숙련공들은 과거 경험을 통해, 공장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의 지지가 없다면 자신들 또한 파업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차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지원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장미꽃과 연대를 호소하는 문구가 적힌 카드를 나눠주며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다른 위치에 있던 두 집단은 함께 춤을 추고 구호를 외치며 파업을 밀고 나갔다,
사업장 내 서로 다른 두 집단이 화합의 태도를 보이자, 사측은 협상에 나섰다. 여성 이주노동자들은 1마르크는 아니지만 53페니히(100페니히=1마르크)의 시급 인상과 저강도 노동 분류 체계의 중단을 약속 받았다.
1973년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파업 이후, 독일의 많은 기업에서 이주노동자들의 파업이 벌어졌다.
출처 : https://n.news.naver.com/mnews/hotissue/article/007/0000007475?type=series&cid=200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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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로 이민간 한국 여성들이 바랐던 건
"돈을 벌고, 자전거를 배우고, 운전 면허를 따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이혼을 하기도 하고, 교육을 통해 새로운 직장을 얻기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가는 것" 이었음.
똑똑한 한국 여자들은 60년대부터 이미 한국 인셀남들에게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걸 알고 있었던 것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간다는 것 = 인간답게 살길 바란다는 것인데 한국 인셀남자들은 이를 외면하고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자들을 착취해서 편안한 삶을 유지하려는 멍청한 선택을 하려고 함. 무너져가는 구시대 시스템을 부여잡고 있는 남자들하고 뭣하러 결혼하고 애를 낳음? 저출산 문제는 노처녀들이 먹고 살만해져서가 아니라 여자 착취해서 꿀빠려는 인셀남들 본인에게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