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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드라마 ‘졸업’ 로맨스는 미끼일 뿐 본론은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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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0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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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12회, 학원에서 국어 강의를 하던 표상섭 선생(김송일)이 이런 얘기를 한다. “이광수의 <무정>을 처음 읽을 때 너무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삼각관계에 빠진 형의 일기장을 훔쳐 읽는 거라고 생각해봤다. 그렇게 보니 꿀잼이더라.” 문학조차 주입식으로 교육받은 아이들에게 흥미를 부여하기 위해 한 말이다. 좋은 떡밥이다.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건 재미있다. 그런데 사실 고상 떠는 사람들의 속내를 엿보거나 이웃의 스캔들 현장을 직관하는 듯한 재미로는 안판석 감독 드라마가 최고다. 이 드라마도 그렇다. 극본은 감독이 공모전에서 발탁한 신인 박경화 작가와 함께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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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이들이 하이퍼리얼리즘으로 해부하는 현장은 입시 학원가다. <졸업>의 홍보 포인트는 학원에서 벌어지는 사제 간 로맨스다. 그러나 12회까지 진행된 현재, 로맨스는 잔가지처럼 느껴질 정도로 교육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졸업>의 교사와 강사들은 가르침, 배움, 교수법, 입시 제도, 공부 등 교육 다방면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한다. 시청자를 가르치기 위한 연설이 아니라 그 직업군의 사람들이 일상에서 나눌 법한 대화다. 말로 먹고사는 사람들인 만큼 하나같이 달변인 점이 어색하지도 않다. 한국에서 인문계 대졸 이상 사회인의 언어를 이렇게 핍진하게 그린 드라마는 흔치 않다. 학원 강의 장면도 분위기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길고 현장감 있게 묘사한다. 특히 정려원의 시선을 끄는 능력, 문장의 강조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달하는 능력이 강의 신에서 빛을 발한다. 그의 강의는 수능 볼 일 없어도 귀담아듣게 될 만큼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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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학부모의 불안을 자극하는 학원의 전략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치동 국어 학원 인기 강사 서혜진(정려원)이 후배에게 시범을 보인다. “‘드넓은 지식의 망망대해에 발을 들이기엔, 댁의 자녀는 너무 늦었습니다.’ 창의적인 주입식 교육과 훈련의 힘을 믿게 해야죠.” 학원 대표는 강사들에게 이런 연설을 늘어놓는다. “대학 입시라는 이 아이와 학부모가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계급의 분기점’에서 선생님들은 북극성 같은 존재가 되어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졸업>은 이런 사교육을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않는다. ‘일타강사’를 백마 탄 왕자의 대체제로 활용한 <일타 스캔들>이나 젊은 팬층을 확보한 셀러브리티로 보고 포섭하려는 최근 예능 프로그램의 흐름과도 맥이 다르다.


1회에서 서혜진은 공교육과 대차게 충돌한다. 학교 시험에 오류가 있었고, 교사는 학생들의 정정 요청을 거부했다. 학생 엄마들은 학생부 평가에 불이익을 받을까 봐 직접 학교를 상대하는 대신 혜진을 찾아와 징징댄다. 결국 혜진이 교사와 언쟁을 벌인다. 혜진은 교사에게 “낡았다”고 말하고 교사는 혜진에게 공교육에 빌붙는 “기생충”이라 한다. 하지만 문제 분석에서는 혜진이 교사보다 낫다. 이 장면은 후에 “서혜진이 교사를 교무실 한복판에서 목매달았다”고 표현된다. 그 목매달린 교사가 바로 서두에 언급한 표상섭이다. 배우 김송일의 독특한 아우라로 탄생한 이 지독하게 예민하고 고집 세고 위태로워 보이는 캐릭터는 혜진과 대립쌍을 이루며 드라마의 주제를 이끌어간다.


시험문제 오류 에피소드는 1점, 2점으로 내신이 갈리고, 하여 대학이 갈리고, 종국에 사회적 대우가 달라지는 대한민국 현실을 반영한다. 사교육은 필요악이 되었고, 공교육 현장에는 패배감이 만연하다. 더 이상 공교육이냐 사교육이냐 이분법은 먹히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 당사자들이 할 일은 뭐냐, 그게 이 드라마의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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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서혜진은 먹고살기 위해 학원 강사가 되었다. 8등급 이준호(위하준)를 전담해 명문대에 보낸 것으로 일대에서 유명해졌다. 그때 혜진은 준호에게 공부의 재미를 가르쳐주려 노력했다. 현재 혜진의 스타일은 다르다. 훨씬 노련하고 기능적이다. 기출 문제 분석, 예상 문제 출제, 정답 맞히는 법 전수의 달인이다. 그는 직업인으로서 자기 능력과 노력에 긍지가 있지만 사교육은 공교육보다 비천하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대기업에 다니다가 학원 강사로 전업한 이준호는 서혜진과 전혀 다르다. 그는 서혜진 때문에 인생이 바뀐지라 공교육과 사교육에 우열을 두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통했던 혜진의 초기 교육법을 학원에서 재현하려 한다. 또한 국어 교육은 다른 모든 공부의 기본이고, 그렇기 때문에 정답 맞히기가 아니라 제대로 읽는 법을 가르쳐야 하며, 그런 느린 교수법의 수요가 분명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 


표상섭은 초반의 무능한 모습과 달리 학생들에게 애정도 있고 신념도 있고 조금은 인기도 있는 교사로 그려진다. 그는 서혜진에게 목매달린 후 공교육의 힘을 보여주겠다며 교과 범위 내에서만 시험을 출제하기로 했다가 정작 자신이 공교육의 한계에 부딪힌다. 시험의 객관식 변별력이 떨어지면서 주관식에서 감점 요소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기간제 교사들은 교원 평가와 학부모 항의가 두려워서 짜증을 낸다. 학원 강사들이 진짜 학생을 위한 교육이 뭔지 고민하는 동안 학교 교사들은 자기 안위 때문에 손발이 묶인 아이러니한 상황. 급기야 젊은 교사로부터 “그냥 아무것도 안 하시면 안 돼요?”라는 말을 들은 표상섭은 학교를 그만두고 학원으로 향한다. 이 대목에서 그는 신념이 너무 강해 뚝 부러지고 흑화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혜진과 준호의 갑론을박을 ‘꿀잼이네’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모종의 영감을 얻는다. 싸우는 두 사람 사이에서 멀뚱히 술을 마시는 표상섭에 포커스를 맞추는 연출은 안판석표 코미디의 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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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모두 서로에 의해 배우고, 성장한다. 그게 이 드라마의 가장 희망적인 부분이다. 이들은 모두 좋은 교사이자 학생이다. <졸업>이 궁극적으로 공교육이냐 사교육이냐를 떠나 가르침과 배움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건 매력적인 서브 커플 남청미(소주연)와 최승규(신주협)에게서도 드러난다. 인문계 대학원생 승규는 그 부류가 흔히 그러듯 돈 안 되는 일을 택했다고 입버릇처럼 자조한다. 남청미는 공부를 대하는 자세가 그게 뭐냐 꾸짖고, 그 일로 승규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남청미는 이 드라마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자기 인식이 정확한 사람이다. 그는 성공하고 싶은 야망이 있고, 그 야망에 뒤지지 않는 무게로 가르치는 일을 좋아한다. 승규 역시 말은 그렇게 해도 공부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졸업>에는 흔히 교육의 3대 주체라 여겨지는 교사, 학생, 학부모 중 학부모 얘기가 빠져 있다. 한때 돼지 엄마로 유명했고 아들이 취업까지 했음에도 환영받지 못할 뒷바라지 중인 이준호의 엄마(윤복인), 간간이 등장하는 학원생 부모들이 있긴 하지만 주인공들의 고민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대신 학생들의 주체성이 강조된다. 학부모에게는 불편한 설정일 수도 있고, 현실을 외면한 판타지나 위선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드라마의 주제를 강화하는 데는 효과적인 설정이다.


사내 정치와 입시 학원 간 경쟁에 휘말려 갈팡질팡하던 혜진은 열여섯 살 우등생 이시우(차강윤) 때문에 중심을 찾는다. 시우는 정답을 맞히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 찰 정도로 배움의 욕구가 강한 학생이다. 학교에 환멸을 느끼던 표상섭은 혼자 독서 노트를 써온 학생 성하율(김나연)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청소년들에게는 신체뿐 아니라 지적으로도 성장하고픈 욕구가 있고, 그것을 수행할 에너지가 있다. 시험 성적, 입시, 성공 같은 걸 떠나 그 욕구와 에너지를 현장에서 접하는 성인들의 입장을 돌아보자고, 드라마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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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의 미끼 상품인 로맨스는 주제와 유기적인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혜진이 시장에서 이미 검증된 자기 방식을 버리고 준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건 연애의 영향이 크다. 역으로, 사제지간이라곤 하나 둘 다 성인이라 별문제 될 게 없는 연애 관계에도 직업인으로서의 충돌이 흥미로운 갈등 요소로 작용한다. 혜진이 제자로만 보던 준호를 이성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제법 섹시하다. 성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축축하고 끈적한 감정들이 앙큼하게 그려진다. “나 이건(섹스) 너 못 가르쳐” 같은 대사가 도대체 어떤 머리에서 나오는 건지 궁금할 정도다.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에서는 고집 세고 이상적이고 말 많은 연하남의 단점까지 진절머리 나게 정확히 묘사된다.


종연이 가까워지면서 이 드라마에서 가장 극적인 요소인 경쟁 학원 최형선 원장(서정연)과 혜진의 대립이 본격화하고 있다. 혜진의 학원 부원장 우승희(김정영)와 백발마녀 최형선은 원한을 품고, 음모를 꾸미고, 전략을 짜고, 허를 찌르는 무협형 인간들이다. 혜진은 비교적 선명한 인물이지만 그들과의 수 싸움에서 매번 승리했다. 그런데 마지막 전면전에서 누가 승리할지보다 궁금한 건 인물들의 가치관이 어떻게 변화할지다. 현재의 중등교육 시스템에서 교육 당사자들의 최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힌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졸업>은 심오한 교훈, 감동, 철학을 과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한국 드라마보다 깊이 평범한 인간들의 욕망, 심리, 직업, 일상을 들여다본다. 그것이 이 드라마가 사회와 연결되는 방식이다. 장사치에 그치지 않고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려는 드라마 속 강사들처럼, 방송계에도 시청률 이상의 성취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게 인간의 재미있는 점이고, 이 드라마가 매력적인 이유다.


https://www.vogue.co.kr/2024/06/20/%ec%a1%b8%ec%97%85-%eb%a1%9c%eb%a7%a8%ec%8a%a4%eb%8a%94-%eb%af%b8%eb%81%bc%ec%9d%bc-%eb%bf%90-%eb%b3%b8%eb%a1%a0%ec%9d%80-%ea%b5%90%ec%9c%a1%ec%9d%b4%eb%8b%a4/?utm_source=naver&utm_medium=partne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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