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정책은 대한민국이 서방세계의 자본주의 강국인 미국에 대한 극단적인 의존을 타파하고 본격적으로 국제 외교 무대에 데뷔한 계기로 높이 평가받는다. 국제연합 가입 역시 이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이후 한국은 높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불과 수 년 내에 비상임이사국을 역임하고 사무총장을 배출하는 등 국제 무대의 주요국 중 하나로 빠르게 발돋움한다.
노태우 정부 때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에 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한반도 비핵화 선언, 상호간의 불가침 합의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이해했다는 점에서 호의적인 평가가 있다.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 역시 이후 한국의 외교에 긍정적인 족적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한소수교 이후 한국은 경제적으로 휘청이던 소련에 다량의 차관을 빌려주었고, 직후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로 전환되면서 이를 계기로 불곰사업 등 양국 간 군사교류가 활성화되기도 했다. 불과 반 세기만에 최빈국이던 국가가 공산권의 수장국에게 경제지원을 해 주는 모습은 체제경쟁의 끝을 알리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양국 관계를 넘어 공산권국가에 한국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효과를 발했다
수립 이후 전쟁까지 치렀던 중국, 베트남과의 오랜 적대를 끝마친 1992년 한중수교와 한월수교 역시 중요한 사건이었으나, 한중수교의 경우 세부적인 평가를 두고는 갑론을박이 있는 편이다.
한편, 이 시기 러시아권에 진출한 기업들은 이후 러시아의 모라토리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의리를 지키면서 러시아인들의 대한 인식 상승에 크게 일조하였으며, 동유럽권에 진출한 기업들은 냉전 종식 이후 대한민국의 대유럽 수출기지이자 생산기지로 톡톡하게 기여했다.
이러한 성과로 인해 노태우 정부는 학계로부터 유독 외교 분야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편이다. '동유럽 등 공산권과의 국교 정상화'를 비롯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서울올림픽으로 대표되는 대북 체제경쟁 승리, 국력 우위의 입증을 통한 한국의 자신감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며, 약 10년 후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에서 제기되었던 '퍼주기', '유화정책'이라는 식의 비난도 덜 받았다.
국방 분야에서도 북방정책은 큰 도움이 되었다. 불곰사업을 통해 러시아의 국방기술을 도입할 수 있었고, 러시아의 북한에 대한 군사지원을 끊어버리는 효과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종합해보면, 40년간 이어져온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대한민국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이겼음을 증명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불과 10여년전만 하더라도 북한과 수교를 하면서 원조를 주던 국가들이 북한이라는 파트너를 버리고 한국과 외교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는 것은 당시 북한 입장에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였고, 그만큼 국내외 충격도 굉장했다.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북한이 자력갱생을 운운하며 국제적으로 고립을 선택하는 이유를 들어 이 북방정책을 꼽기도 한다.
- 지금까지 유지해온 북방정책이 날라가네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유지해왔는데 이게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