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나라가 우울했다"고. 안내상은 "학교에 경찰들이 왔다갔다 하는 현장들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 세상이 좀 이상하다. 그러면 나는 거기서 뭘 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했다 .이건 저뿐만 아니라 그때 당시의 청년들의 고민이었다"고 밝혔다.
안내상은 "그와중에 책이나 여러 영역들이 있었지만 음악이라는 게 많이 움직여줬던 것 같다"며 "특히 그 시대에 접한 노래는 김민기 선생님 노래였다"고 말했다.
그는 "연대 뒤에 고원 같이 만들어놓은 데가 있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김민기 선생님 노래를 읊조리고 있더라. 그 노래가 '헐벗은 내 몸이 뒤안에서 떠는 것은 사랑과 미움과 믿음에 참을'이라는 가사다. '두리번 거린다'라는 그 노래가 너무 와닿았다. 어떻게 가야 하나 두리번 거리는 거다. 친구들도 오고 교정도 아름답고 모두가 가만 있으면 행복한 조건이고 그냥 갈 수 있는데 그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이제 나의 길을 가자'고 결심했고 학생운도에 투신했다"고 밝혔다.
김민기의 노래가 학생운동을 하게 된 계기라는 것. 그는 "그러다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며 술렁임이 일기 시작했다. 어린 청년이 죽었다. 그런 거에 분노한 시민들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뭔가 일어나려는 분위기였다. 집회를 하며 많이 모이기 시작해 힘이 나서 교문으로 나갔는데 한열이가 당했다"고 말했다.
연세대 재학생이었던 이한열 열사는 당시 최루탄에 맞았다. 안내상은 "한열이는 제 후배였다. 한열이는 또 특별한게 제가 언더써클이라는 걸 하고 있었는데 저희 언더써클이었다. 그리고 한열이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애기를 듣고 모두 미친듯이 오열했던 한 달간의 과정이 있었다"고 떠올렸다.
안내상은 "노제를 지낸다고 시청으로 가자고 해서 연대에서부터 운구 행렬이 로터리를 거쳐 시청으로 가는데 가는 족족 시민들이 합류하시는 거다. 도로가 꽉 차고 저희는 항상 너무 외롭게 우리끼리만 소수 정예로 움직였는데 그많은 사람이 합류한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시민들이)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 대해, 광주에 대해 잘 모르는 줄 알았다. 워낙 언론이 통제된 시점이라. 근데 사람들이 다 가슴에 품고 있던 거다. 저희는 (당시) 투쟁가를 불렀다. 그런데 일반 시민과 학우를 모르니까 부를 수 없잖나. 몇 명만소리쳐 부르는데 누군가 '아침이슬'을 부르기 시작했다. 다 아는 거다. 전부 그 많은 사람이 '아침 이슬'을 부르는데 정말 감동이었다"고 당시 소감을 전했다.
안내상은 "애국가가 '아침이슬'이었던 거다. 우리 마음을 대변할 수 있는. 많은 사람이 그 노래 덕분에 위로받았고 그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가다듬는 계기가 됐다. 저도 그랬고. 김민기 선생님의 역할은 당시 대단했던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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