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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5년전 서울대 커뮤니티에 올라왔던 '관악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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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5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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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이 글도 10년전 글이다


"학생 서울대학교 다녀요?"
녹두거리 편의점 파라솔에 걸터앉아서 맥주를 마시는데 웬 낯선 아저씨가 와서 물었어요. 아마 제 과잠을 보고 아셨나 봐요.

"네."
"신림동에서 자취하나 봐요?"
"아니요. 통학합니다."
제가 여자였다면 벌써 도망가야 했을 멘트였지만 전 남자여서, 의심쩍지만 그냥 대답했어요.

"어이구, 통학하는데 이 시간에 왜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어. 힘들어요?"
그래요. 그날따라 좀 마음이 허했어요. 시험도 있고 과제는 많고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은 많아서 벌려놓느라 이리저리 꼬이고... 인간관계는 갈수록 어렵고 친구들은 하나둘 떠나고. 시끌시끌하던 새내기 시절이 한참 지나가고 나니 남은 대학생활은 외로움을 견디는 것만 남았나, 싶기도 하더라구요.
그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들어서, 녹두에서 약속이 끝나고 이젠 새벽 2시가 가까워 오는데 집에 가기가 너무 싫고 시원한 맥주 한 잔 땡겨서, 비칠비칠 편의점 앞에 외롭게 걸터앉은 참이었거든요. 때마침 누가 말을 걸어주니 의심쩍지만 내심은 반가운 마당에, "힘들어요?" 한 마디에 스르르 마음이 풀렸어요.

"네...힘드네요. 하하.."
"왜, 공부가? 사람이?"
"그냥요. 이것저것...공부든 사람이든 다 힘들죠. 학년 먹을 수록 힘든 그런거.. "

잠깐 기다리라면서 아저씨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비싼 외국맥주랑 안주를 사오셨어요. 먹으라고 하시면서 아저씨가 말했어요.

"학생 관악 02 타본적 있어요?"
"네 당연하죠."
"내가 그거 버스기사 하고 있어요."

아저씨는 지금 관악 02를 실제로 운행중이신 현직 기사님이셨어요. 이제는 낙성대 일대는 눈 감고도 다니신대요.
아저씨는 딸이 하나 있으셨어요. 공부도 엄청 잘해서 서울대학교 입학하는 걸 오래 전부터 꿈꿨대요. 집안이 넉넉질 못하고 아버지가 버스기사라 돈도 많이 못 벌어다 준다고 매번 미안해했는데도 불평 한 번 안하고, 하루 진종일 일하고 집에 녹초가 돼서 떡볶이 순대 사들고 집 들어가면 늦은 시간인데도 늘 공부하고 있었대요.

그렇게나 예쁘고 착한 아저씨 딸이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간지 얼마 안 되고, 하필이면 또 버스 사고로 세상을 떴을 때, 아저씨는 모든 걸 포기할까도 생각하셨대요. 매일매일 낮밤으로 술만 퍼마셨고 아내분은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셨대요.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잔뜩 취한 채로 신림동 일대를 비틀비틀 지나가다가, 딸하고 너무 닮은 학생이 서울대 과잠을 입고 친구들이랑 재잘거리면서 지나가더래요. 문득 술이 확 깨면서

'딸내미가 지금 살아 있다면 이제 대학교 입학했겠구나, 아마도 서울대에 들어갔겠지.'
하는 생각이 드셨고 그 길로 다시 버스 운전대를 잡게 되셨대요. 딸이 지금쯤 제 나이쯤 되는 남자친구를 데리고 와서는 집에 자랑했을지도 모른다고, 맥주를 한 모금 꿀꺽 삼키시고는 허허 웃으셨어요.

" 그때부터 버스 타는 학생들을 하나하나 뜯어봐요. 그때 우리 딸 닮은 그 학생도 탔나, 하고. 내가 가방끈이 짧아서 잠바 뒤에 적힌 말이 뭔지를 몰라. 과에다가 전화를 해보겠어, 뭘 하겠어. 그러니까 처음에는 우리 딸도 아니고, 딸 닮은 사람 하나 찾자고 이거 시작한 셈이에요. 그러다가, 처음에는 안 닮은 사람이면 그냥 넘어가고 남학생들도 넘어가고 그렇게 보다가, 나중 가니까 얘들이 우리 딸 친구 후배 선배겠구나, 싶으니까 얼굴이 하나하나 다 보여요. 어쩜 다 이뻐. 삼삼오오 모여가지고 좋다고 떠드는 것도 예쁘고, 공부하느라 힘들다고 한숨 푹푹 쉬면서 버스에 타도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면 그렇게 또 이뻐. 그렇게 하루하루 하다 보니까 이제 우리 딸도 졸업 다 했겠네. 근데도 아직도 버스 몰아요. 습관이 되고 일이 돼서."
"따님 닮으신 분은 찾으셨어요?"
"아니 결국 못 찾았어. 아마 졸업했을거에요. 그럼 어때. 매년 3천명씩 아들딸이 들어오는데요."
"아"
"서울대 버스기사 몇년 귀 열고 하다 보면, 시험기간이 언젠지도 다 알아요. 유명한 수업은 이름도 외고, 어떤 교수가 얼마나 못 가르치는지도 알 수 있어요. 그럼 요즘 학생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는 얼마나 잘 알겠어요. 아무튼간에.. 힘든데 무작정 힘내는 것보다, 힘들면 가끔 이렇게 맥주 먹고 쉬어. 그리고 어떤 이상한 아저씨가 응원해주고 있다고 생각도 해보고 그래요.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자기 이렇게 생각해주고 있다고 느끼면 얼마나 가슴 따뜻하고 좋아."

힘들죠. 힘든 세상이에요. 취업도 힘들고, 뭐해먹고 살지도 모르겠고. 사람들은 군대 간다 대학원 간다 교환학생을 간다... 하나 둘 떠나고 새내기 때 맘 맞던 친구들도 연락이 슬슬 끊기고. 어떻게 보면 제가 앞서 했던 고민은 아저씨 얘기 들었다고 해결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새내기 시절을 보내고서 남은 대학 생활은, 아니 남은 인생은 정말로 그저 외로움을 참고 견디는 과정의 연속일지도 몰라요.

그런데요. 외로워도 행복할 수 있어요. 진짜로 내 곁에 누가 있어 주지는 않아도 행복할 수 있어요. 지나가는 사람들, 함께 숨쉬고 스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나처럼 외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더 이상 외로움이 불행으로 바뀌지 않아요. 그리고 나처럼 외로운 사람들이니까, 따뜻하게 안아주고 사랑해줘야겠다고 생각해 보세요. 직접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지 않아도 돼요. 말을 걸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저 그냥 속으로 응원해주세요. 나처럼 외로운 사람들은 생각보다 정말 많아요. 그 외로움은 우리 모두가 다, 형태만 다르도록 가슴 속에 하나씩 품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 남들의 외로움을 보듬어 주는 것처럼, 낯설겠지만 나도 보듬어 주세요.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아침 수업을 드랍하더라도
술 많이 먹고 죽어서 다음 날 숙취로 아무것도 못하더라도
무기력증에 빠져서 하루종일 페이스북만 보고 있더라도
과제를 밀리고 공부를 못해도
사람들에 허덕이다가 진짜 친구는 몇 남지 않더라도
그렇게 처절하도록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지라도
그 외로움과 고독이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로 해요.

외로움은 불행과 동의어가 아니에요. 모두가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알면, 우린 외로워도 행복할 수 있어요.
저는 요즘 다시 헬스를 시작했어요. 살도 빼고 건강도 다시 찾으려구요. 힘들겠지만 이번 학기는 공부도 열심히 해서 장학금도 노려볼까 합니다. 이것저것 맡은 일들도 잘 마무리했고 남은 것도 잘 끝내 볼거에요. 솔직히 여전히 외롭고 힘들어요. 저만 외롭고 힘든건 아니니까요. 아이러니한 표현이지만, '함께 외로워서' 행복할 수 있는 법을 찾는 중이에요.

요즘은 일부러 위쪽으로 올라가서, 관악 02를 타고 낙성대에 내려서 통학하곤 해요. 그런데 아직 아저씨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이제 그만두신 걸까요. 그래도 괜찮아요. 인연이라면 언젠가, 어디에선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또 반갑게 마주치겠죠.

날씨가 많이 추워졌네요. 서울대 여러분들, 아니 글을 읽는 모든 분들 감기 조심하시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여러분은 제 이름도 성도 모르시겠지만, 제가 언제나 외로워하는 여러분들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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