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해외 레드 카펫에서 손예진을 자주 볼 것 같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티저 포스터가 공개됐다. 녹음 아래 배우 이병헌과 손예진은 춤추듯 손을 맞잡고 있다. 손예진은 시나리오를 여러 의미로 ‘미쳤다’고 표현했다. “이병헌 선배가 연기하는 캐릭터 ‘만수’는 남녀를 떠나 배우라면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역할이죠. 레이어가 많으면서도 감정의 끝과 끝을 보여주거든요. 제가 연기한 ‘미리’는 만수의 아내지만 역할 비중이 크지 않아요. 그럼에도 시나리오가 압도적으로 좋았고,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 컸기에 선택했어요.”
손예진에게 박찬욱 감독의 세계관은 ‘불편한 아름다움’이다. “독특하면서도 이국적이지만 우아함과 품위를 잃지 않죠. 그의 캐릭터들은 처음엔 낯설고 ‘왜 저럴까?’ 의문이 들지만 갈수록 빠져들어요. 감독님은 예술가예요. 이번 작품은 감독님 특유의 미장센과 대사, 상황은 벌어지되 보는 이들이 ‘내가 만수라면’ ‘내가 미리라면’ 이렇게 대입하게 만드는, 어찌 보면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 아닐까요?” 이 시나리오는 17년 전부터 박찬욱과 이경미 감독이 함께 작업했다. 개인적으로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2016)의 손예진(연홍)을 무척 좋아한다. 극의 긴장을 증폭시키는,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의 얼굴. 이 작품을 기점으로 더 다양한 역할이 주어졌다고 손예진은 회고했다.
손예진은 지난해 데뷔 25주년을 맞았다. “따로 이벤트는 하지 않았어요. 그저 20대에 시작해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렀구나 싶었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손예진 특별전’을 열며 대신 축하했다. 상영작 6편은 <클래식>(2003),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아내가 결혼했다>(2008), <오싹한 연애>(2011), <비밀은 없다>, <덕혜옹주>(2016)다. 대중적으로 사랑받거나 연기 호평을 받은 작품으로 추렸다. “발자취를 따라가는 자리라니 감사했죠. 하지만 지난 작품을 다시 보는 건 너무 부끄러워요. 목소리도 아기 같고 연기도 못한 거 같고요. <클래식>을 리마스터링할 때 감독님께 다시 더빙하고 싶다고 말씀드릴 정도였죠.” 손예진은 “이것저것 재지 않고 그때 하고 싶은 작품을 선택해왔다”고 말한다. “멜로에 나오는 저를 선호하는 분이 많지만, 제가 뭘 잘하는지 모르겠어요. 그저 시나리오와 작품만 보고 연기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굴곡 없는 필모그래피만 봐도 손예진의 작품 보는 눈은 부정할 수 없다. “작품을 잘 선택하는, 연기를 잘하기 위한 훈련에는 정답이 없어요. 시나리오를 많이 본다고 작품 보는 눈이 무조건 길러지지 않는 것처럼요.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하나하나의 일상이 다 공부가 된다는 거예요. 아이를 낳은 경험, 누군가와 싸운 경험, 함께 행복한 경험이 쌓여 자양분이 되죠.” 그런 점에서 손예진에게 최근 가장 큰 전환점은 출산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전에 없이 행복을 실감한다고 했다. “아이가 아프지 않고 오늘 하루 밥 잘 먹고, 식구끼리 조용히 햇볕을 받고 있으면 너무너무 행복해요.” <어쩔수가없다>는 출산 후 첫 작품이다. “촬영하며 스태프들에게 ‘예진 씨, 뭔가 달라졌어요’라는 말을 종종 들었어요.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 역할이라 제 상황이 더 투영됐을 수도 있죠. 하지만 좀 더 넓은 변화예요.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사는지 얼굴에 흔적이 남잖아요. 아이라는 세계가 저를 성장시키면서 연기 폭도 넓혀주는 것 같아요.”
손예진은 요즘 일을 하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 전까지는 일에만 매진해 삶에 엄격한 기준을 도입했고, 흥행 성적이 좋지 않으면 자신을 채근했다. 이제 일을 대하는 태도에 여유가 생겼고, 이런 마음의 공간으로 일과 더 친근해졌다. “과거엔 100m 달리기를 연이어 전력 질주한 것 같아요. 이제는 마라톤을 하려고요.”
손예진은 ‘배우 인생 두 번째 챕터’라는 말을 한 적 있다. “이전에는 스릴러면 스릴러, 이렇게 구체적으로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젠 내가 비중이 작더라도 좋은 작품이라면 용감하게 해나가고 싶을 뿐이에요.” 일이 아닌 일상에서는 버킷 리스트를 새롭게 쓰기 시작했다. 가족과 아프리카 사파리에서 노을 보기, 눈 오는 날의 캠핑, 외딴곳에서 열흘 살아보기 등 생각날 때마다 휴대폰에 메모한다.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고 한 번쯤 삶의 반경을 넓히고 싶어요. 작지만 커 보이고, 커 보이지만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작은 것들이에요. 아직 이룬 건 없지만 하나씩 체크하길 바라며 두 번째를 여는 것도 설레잖아요?”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