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nytimes.com/athletic/6522100/2025/08/04/son-heung-min-is-tottenham-tottenham-is-son-heung-min/
디애슬레틱 잭핏브룩 기자가 쓴 칼럼인데 이게 원문주소이고 저 주소 네이버 검색하면 타싸에서 번역한 글들도 있거든 아직 못본 덬 있으면 같이봤으면해서!
꽤 장문의 글인데 토트넘 입단전부터해서 입단하고 10년의 여정을 시간순으로 쓴 글이라 금방 잘 읽히니까 꼭 한번 읽어봐🥹
내가 번역한거면 스퀘어로 올릴텐데 번역전문 퍼오기는 좀 그렇고 그치만 너무 좋은 글이라 이렇게라도 공유하고싶어서 가져와봤어
이토록 완벽하고도 충만한 순간을 마지막으로 팀을 떠나는 선수는 거의 없다. 그리고 이처럼 완벽한 마무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선수는 더더욱 드물다. 손흥민은 그런 선수였다.
+7덬이 올려준 챗지피티 번역 추가
⸻
1부 – 시작과 완성
손흥민의 토트넘 커리어는 서울에서 끝났지만, 그 10년 여정의 진정한 완성은 빌바오에서 이루어졌다.
그곳에서 그는 5월 유로파리그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의미를 갖게 되었다. 모든 노력, 모든 충성심, 모든 골, 모든 눈물. 그날 밤 북부 스페인에서,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축하 속에서 모든 것이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바로 빌바오에서, 손흥민이 토트넘을 상징하게 되었고, 토트넘 또한 손흥민이 되었다.
그 결승전 전부터 이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이는 당시 감독 앤지 포스테코글루였다. 그는 이 상징성을 동기부여로 활용했다.
“나는 유로파리그 여정 내내 그를 중심에 뒀어요. 사람들은 손흥민을 통해 이 클럽을 보거든요.”
– 포스테코글루, The Athletic 인터뷰
그는 선수들에게 말했다. 맨유를 이기면, 손흥민에 대한 평가, 그리고 토트넘이라는 클럽 자체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선수들은 손흥민을 위해 뛰었고, 동시에 토트넘을 위해 뛰었다. 이제 그 둘은 더 이상 구분되지 않았다.
이토록 구단과 선수가 하나 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손흥민은 북런던에서의 10년을 통해 그것을 이루어냈다. 이는 단지 경기장에서 이긴 것보다 훨씬 깊고, 의심할 여지 없는 사랑이었다. 그는 토트넘이라는 역사와 공동체 속에 깊이, 영원히 새겨졌다.
“손흥민은 토트넘이고, 토트넘은 손흥민이에요.
손 없는 토트넘은 상상이 안 돼요.”
– 제임스 매디슨, 눈물 어린 작별 인터뷰 중
⸻
2부 – 손흥민의 등장과 토트넘 이적 전까지
손흥민과 토트넘의 이야기를 진짜로 시작하려면 10년이 아닌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12-13시즌, 함부르크에서 20세였던 그는 독일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독일 축구에 자리를 잡는 건 쉽지 않았지만, 빠르고 우아한 이 공격수에게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토트넘은 구단 고문이던 데이비드 플리트를 독일로 보냈다. 하지만 플리트는 썩 감동받지 못했다. 함부르크 팀은 형편없어 보였고, 당시 부상에서 회복 중이던 손흥민은 몸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트넘은 손흥민 영입에 흥미를 느껴 함부르크와의 협상에 들어갔다.
이 시점은 토트넘이 가레스 베일 이후를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젊고 역동적인 공격수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손흥민을 데려가기 직전까지 갔던 건 사실 사우스햄튼이었다. 마우리시오 포체티노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던 시기였고, 그는 더 빠르고 많은 골을 넣을 공격진을 원하고 있었다.
“손흥민은 우리가 찾던 유형 그 자체였죠. 역동적이고, 전환에 강하고, 양발을 쓸 수 있고, 수직적으로 뚫는 능력도 있었어요.”
– 폴 미첼 (당시 사우스햄튼 스카우트 총책)
그들은 하이 프레싱, 고강도 축구를 원했고, 손흥민은 완벽히 어울렸다. 결국 2013년 여름, 사우스햄튼이 가장 앞서 있었지만 손흥민은 프리미어리그에 도전할 타이밍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독일에 남아 레버쿠젠으로 이적했다.
이듬해 여름, 포체티노는 토트넘으로 이적했고, 6개월 뒤 미첼도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화이트 하트 레인에 젊고 유망한 팀을 만들어가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공격 옵션이 하나 더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손흥민을 기억했다. 그리고 레버쿠젠의 스타일은 포체티노의 축구 철학과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우리는 손이 어떤 팀에서도 뛸 수 있는 선수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가 얼마나 원칙에 부합하는지도 알았고요.”
– 미첼
레버쿠젠에서 손흥민은 경기력뿐만 아니라 체력적으로도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 두 시즌 동안 94번의 출전 기회 중 단 4경기만 결장했는데, 그나마도 국가대표 소집이나 징계 때문이었다.
2015년 2월, 토트넘은 레버쿠젠의 경기(상대: 볼프스부르크)를 스카우트하러 갔다. 전반전엔 케빈 더 브라위너와 바스 도스트에게 무려 3골을 허용했지만, 후반전은 손흥민의 무대였다. 그는 세 골을 넣으며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하나는 골키퍼 손에서 공을 낚아채서, 하나는 롱패스를 침착하게 잡아 외발 슛으로, 또 하나는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 왼발 슈팅으로 마무리했다.
레버쿠젠은 5-4로 패했지만, 토트넘은 충분히 봤다. 단지 세 골 때문이 아니었다. 골 앞에서의 침착함, 효율적인 움직임, 양발 활용 능력, 그리고 예측 불가한 슈팅 능력 — 이 모든 것이 토트넘 스카우트의 보고서에 들어갔다.
당시 토트넘은 웨스트브롬의 사이도 베라히노에게도 관심이 있었지만, 레버쿠젠 감독과 손흥민 사이의 관계가 틀어졌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는 완벽한 기회였다.
“그때 우리는 모든 자료와 프로파일링을 끝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굉장히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어요.”
– 미첼
2015년 8월 28일, 손흥민은 2,200만 파운드(현재 환율로 약 2,900만 달러)에 토트넘에 입단했다.
“그 금액으로 손흥민 같은 선수를 데려온 건 우리가 커리어에서 한 최고의 투자 중 하나예요.”
– 미첼
⸻
3부 – 적응 실패, 이적 고민, 그리고 전환점
케빈 비머는 손흥민이 토트넘에 처음 왔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그해 여름 쾰른에서 이적해 왔고, 손흥민과는 레버쿠젠-쾰른 지역 라이벌로 마주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곧 깊은 우정의 시작이었다.
“첫날부터 그는 항상 웃고 있었어요. 제가 독일어를 할 줄 아는 걸 알고선 바로 다가와서 편하게 말을 걸더라고요. 정말 따뜻한 사람이에요. 모두에게 친절했고, 저한테도 마찬가지였어요.”
– 케빈 비머
그해 여름의 토트넘은 젊고 야망 넘치는 팀으로 다시 태어나는 시기였다. 포체티노와 미첼은 감독과 스카우트로서, 헌신적인 신예들을 하나둘 모아 팀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시작은 좋아 보였다.
9월 17일, 유로파리그 개막전에서 손흥민과 19세 델레 알리는 카라바흐를 상대로 두 번째 선발 출전 기회를 받았다. 손흥민은 앤드로스 타운센드의 코너킥을 골로 연결했고, 곧이어 델레와의 원투 패스로 두 번째 골까지 터뜨렸다. 3일 뒤 프리미어리그 크리스탈 팰리스전에서는 왼쪽을 돌파해 결승골을 넣었다.
그는 분데스리가 시절의 손흥민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거짓된 서막’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맨시티전에서 손은 족저근막을 다쳤다. 발바닥 밑의 중요 조직이다. 그 부상 이후, 손은 두 달 가까이 선발에서 사라졌고, 크리스마스가 지나서야 다시 골을 넣었다.
포체티노는 중요한 경기에서 에릭 라멜라, 델레 알리, 크리스티안 에릭센을 선호했다. 해리 케인 뒤 2선에는 손의 자리가 없었다. 시즌 전체에서 리그 선발 출전은 고작 10경기. 그나마 세 경기는 시즌 말미였고, 두 경기는 레스터가 우승을 확정지은 뒤였다.
당시 클럽 내에서는 손이 축구를 즐기지 못하는 것 같다는 우려가 있었다. 미첼은 긍정적으로 기억했다.
“언제나 밝은 미소로 훈련장에 들어왔고, 열심히 훈련했어요. 포기하려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스태프들은 훈련 태도가 기대 이하였고, 다시 자리를 잡기 위한 투지가 부족해 보인다고 느꼈다.
⸻
4부 – 토트넘을 떠날 뻔했던 순간
2016년 8월, 손흥민은 브라질 올림픽에 출전한 뒤 팀에 복귀했다. 그를 노리던 독일 볼프스부르크의 제안도 있었다. 분데스리가에서는 이미 검증된 자원이었고, 커리어를 위해서라면 떠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 거의 떠날 뻔했어요. 포체티노 감독에게 가서 ‘편하지 않다, 독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죠.”
– 손흥민, 2019년 런던 이브닝 스탠다드 인터뷰
하지만 토트넘의 생각은 달랐다. 1년 전에 2,200만 파운드를 투자한 선수를 쉽게 보낼 순 없었다. 내부적으로는 손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그의 잠재력을 믿었다.
포체티노는 손을 직접 설득했다.
“모든 선수에게 말했듯, 출전은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는 떠나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그의 능력을 믿었고, 헐값에 보낼 생각이 없었죠.”
– 포체티노, 저서 『브레이브 뉴 월드』
그 여름, 손흥민은 불확실한 상태였다. 올림픽 때문에 시즌 초반을 함께하지 못했고, 내부에서도 “발은 거의 두 쪽 다 문밖에 나가 있었다”는 말이 돌았다.
8월 말, A매치 휴식기를 마치고 귀국한 그는 훈련장에서 빼어난 폼을 보여주었고, 포체티노는 바로 다음 리그 경기에서 그를 선발로 기용했다. 9월 10일, 스토크 시티 원정.
이 경기가 손흥민의 진짜 토트넘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그는 두 골을 터뜨렸고, 케인의 골도 어시스트하며 4-0 승리를 이끌었다. 두 번째 골은 박스 바깥에서 감아 찬 완벽한 슈팅이었다.
그 후 미들즈브러전에서도 두 골, CSKA 모스크바전에서도 결승골, 그리고 펩 과르디올라가 이끄는 맨시티를 상대로는 케인 없이 ‘가짜 9번’으로 나서 맹활약하며 2-0 승리를 이끌었다.
⸻
5부 – 손흥민의 전성기와 명장면들
결국 손흥민의 진가는 2016년 가을부터 폭발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6년 이상 — 길게 보면 8년 동안 — 그는 월드클래스 공격수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전성기를 설명하는 새로운 말은 많지 않다.
• 그는 누구보다 빨랐다. 전속력으로 뛸 때, 따라올 수 있는 수비수는 거의 없었다.
• 그는 움직임이 날카로웠다. 거의 모든 오프사이드 라인을 교묘하게 무너뜨렸다.
• 그는 마무리가 좋았다. xG(기대득점) 수치를 매 시즌 해리 케인보다도 크게 상회할 정도였다.
• 그는 양발 모두를 완벽히 썼다. 미첼은 “내가 본 선수 중 양발을 이 정도로 자유자재로 쓰는 선수는 없었다”고 회상했다.
손흥민은 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예술 작품 같은 선수였다. 왼쪽에서 치고 들어와 몸을 열고, 전속력 상태에서 골대 반대편 구석을 정확히 찔렀다. 그 순간, 모든 관중과 벤치가 **‘이건 골이다’**라는 확신을 느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그의 포지션에서 저 정도의 득점과 도움을 해내는 선수는 드물었습니다. 특히 왼쪽에서 골대 반대편 하단 구석을 노릴 때는, 공을 차기도 전에 이미 ‘골이구나’ 하고 알 수 있었죠.”
– 포스테코글루
손흥민의 가치는 단지 미학적 플레이나 기록(프리미어리그 통산 127골, 공동 16위)에 있지 않았다. 중요한 순간에 골을 넣는 능력이 그의 진짜 강점이었다.
포체티노 시절, 팀 내에는 세 명의 ‘넘버원’이 있었다. 케인(폭발적 득점력), 델레(큰 경기에서 판을 바꾸는 재능), 그리고 손흥민. 손은 중요한 경기, 결정적인 순간을 해결했다.
그의 골들을 떠올려보자.
• 2015-16 시즌 왓포드전 89분 결승골 — 챔피언스리그 진출 경쟁의 분수령.
• 2017년 도르트문트전 결승골.
• 2019년 도르트문트와의 챔스 16강 1차전 선제골.
• 토트넘 신구장 첫 공식 경기(팰리스전) 첫 골.
• 그리고 6일 뒤, 맨시티와 챔스 8강 1차전 선제골.
최고의 순간은 역시 2019년 4월, 에티하드 원정이었다. 1차전에서 1-0 승리를 거둔 뒤, 맨시티가 홈에서 초반부터 몰아붙였다. 이미 합산 스코어가 동점인 상황, 7분 손흥민에게 루즈볼이 왔다. 오른발 첫 터치 후, 에데르송 다리 사이로 골. 2분 뒤 루카스 모우라의 패스를 받아 완벽한 첫 터치로 카일 워커를 따돌리고, 몸을 열어 왼발로 먼 포스트 상단 구석에 꽂았다.
그 두 골은 손흥민의 모든 것을 상징했다. 결정력, 우아함, 그리고 최고 수준의 압박에서 보여준 평정심.
이후에도 그는 계속 팀을 구했다.
• 2020년 2월 아스톤빌라전(부러진 팔을 안고 뛴 채) 후반 추가시간 결승골.
• 코로나로 무관중이던 2020년 가을, 맨시티와 아스널을 상대로 선제골.
• 2021-22 시즌은 그의 커리어 하이라이트였다. 시즌 초, 맨시티전 선제 결승골을 넣었고, 시즌 막판 10경기 12골을 몰아치며 리그 득점왕(23골)을 리버풀의 모하메드 살라와 공동 수상했다.
⸻
6부 – 100호 골과 팀 동료들과의 끈끈함
2023년 4월, 브라이튼전에서 터진 프리미어리그 100호 골은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그날 밤, 그의 절친 벤 데이비스가 집에서 작은 파티를 열어 함께 축하했다.
손흥민은 수많은 팀 동료들과 특별한 유대감을 쌓았다. 2022년 프리시즌에 토트넘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모든 선수와 스태프에게 개인 맞춤 선물을 준비했다. 2023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브랜드 제품으로 선수들에게 선물을 챙겨줬다. 포스테코글루조차 모자, 티셔츠, 화장품 세트를 선물받았다.
“손흥민은 자신이 쌓은 명성과는 별개로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는가’로 평가받아야 해요. 그는 늘 베풀었고, 그게 진짜 위대함입니다.”
– 포스테코글루
손흥민은 팬들에게서 선물을 받으면, 일일이 감사 인사를 하고 모든 걸 챙겨 직접 집으로 보냈다.
그는 늘 이런 사람이었다.
• 토트넘 입단 초기에 선수들과 스태프를 위해 직접 한식을 대접하는 큰 연회를 열었다.
• 훈련 후, 비머를 집에 초대해 어머니가 직접 요리를 해줬다. (“손 어머니는 저를 친아들처럼 챙겨주셨어요.” – 비머)
훈련장에서 팬들을 위해 사인을 해주거나, 갑자기 연락해 안부를 묻는 따뜻한 행동은 그를 아는 모두가 기억하는 특징이다.
“손흥민은 대중이 보는 모습 그대로의 사람입니다. 단 한 명이라도 그를 험담할 사람을 찾기 힘들 겁니다.”
– 포스테코글루
⸻
7부 – 남기로 한 선택이 만든 전설, 그리고 마지막 시즌
2016년 여름, 토트넘을 떠나려다 남기로 한 결정이 손흥민을 만들어냈다면, 2020년 여름의 결정은 그의 레전드로서의 유산을 확립했다.
그 시즌은 이상한 시기였다. 주제 무리뉴가 감독이었고, 팬 없는 무관중 경기가 이어졌다. 시즌 초반은 좋았지만 곧 팀은 내리막을 탔다. 케인은 맨시티 이적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시즌이 끝난 뒤 실제로 시도했다. 당시 28세였던 손흥민은 커리어 피크였다. 세계 어느 팀에서도 뛸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때 손은 또 한 번 토트넘에 남기를 선택했다.
그해 가을, 새로운 장기 계약에 합의했고, 2021년 7월 공식 발표됐다. 4년 계약이었다. 그리고 그 4년은 곧 손흥민의 마지막 토트넘 시기가 되었다.
2023년 여름, 케인은 결국 바이에른 뮌헨으로 떠났고, 주장이던 위고 요리스도 이별을 앞두고 있었다. 새로운 감독으로 포스테코글루가 부임했고, 그는 새 주장을 정해야 했다.
“내가 주장에게 가장 원한 건, 팀을 하나로 만드는 힘이었어요. 손흥민은 어떤 테이블에서도 모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바로 그런 리더가 필요했죠.”
– 포스테코글루
그는 매일 훈련장에서 초년생 같은 태도로 임했고, 그 에너지는 팀 전체로 퍼져 나갔다.
2024-25시즌, 손흥민의 마지막 시즌.
그는 계속된 부상에 시달렸고, 크리스마스 이후 리그에서 단 두 골만 넣었다. 전성기만큼의 폭발력도 사라진 듯 보였고, 유로파리그에서 중요한 순간(프랑크푸르트 원정 8강 2차전, 보되/글림트전 4강 1·2차전)은 결장했다.
하지만 포스테코글루는 그 결승전 전날, 손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했다. 비록 선발 출전은 어렵고, 리샬리송이 왼쪽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손흥민은 이 클럽을 상징하는 존재예요. 그가 트로피를 드는 순간, 사람들은 이 클럽도 다르게 보게 될 거예요.”
– 포스테코글루, 선수들에게
“우리가 그를 역대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올려주고, 트로피를 들어 올리게 만든다면, 우리 모두는 그의 유산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경기 종료 후, 손흥민이 트로피를 안고 눈물을 쏟는 장면은 그토록 강력했다.
그는 고난의 시간을 견뎠고, 결국 토트넘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다.
그의 여정은 곧 토트넘의 여정이었다.
그의 정당화는 토트넘의 정당화였다.
그의 눈물은 토트넘의 눈물이었다.
⸻
8부 – 완벽한 작별, 그리고 그가 남긴 것
이토록 완벽하고 충만한 순간에 작별할 수 있는 선수는 거의 없다.
그리고 이토록 그럴 자격이 있는 선수는 더더욱 드물다.
손흥민은 그 자격이 있었다.
그는 축구의 기쁨을 온몸으로 체현했다.
수비수를 제치며 전진할 때의 전율,
슈팅 순간의 우아함,
네트를 가른 뒤의 기쁨.
하지만 그는 단지 축구만을 전한 게 아니었다.
사람의 기쁨, 온기, 사랑을 전했다.
그는 골을 넣을 때, 팀이 이겼을 때,
“내가 이 팀에서 골을 넣을 수 있다니, 난 정말 행운아야!”
그 표정으로 웃었다.
그는 그 행운을 팬들과 나누고,
그 기쁨을 모두와 공유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