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준은 자신이 어리다는 걸 잘 알았다. 자신이 처한 젊음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모든 순간에, 그는 푸르고 간명한 속내를 서슴없이 내보였다. 한계와 가능성에 관해서는 판단을 유보했다.
독립했다면서?
숙소 생활하다 올여름에 나왔다. 8월 19일에.
날짜까지 기억하나. 혼자 사는 게 처음인가?
처음이다. 정말 좋다. 장단점이 있는데… 실은 좀 외롭다. 그래서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내가 집 비울 때, 외롭지 말라고 두 마리를 키운다. 이름은 오키, 도키.
단점은 외로움이고, 장점은 뭔가?
사실 외로움은 감당할 수 있는 단점이다. 나는 혼자 사는 삶이 잘 맞다. 나의 시간, 공간이 있는 게 좋다. 내 공간을 정성스럽게 꾸미는 스타일은 아니다. 집에 가구도 거의 없다. 꼭 필요한 것만 들였다. 거실에는 텔레비전 하나, 소파 하나, 소파 테이블 하나. 방에는 침대, 히터. 그게 끝이다. 조명 기구 한두 개 정도 있고.
어느 인터뷰에서 한강 보이는 집에 살고 싶다고 말했는데, 지금 집에서 한강이 보이나?
아니. 그 로망 사라졌다. 집 알아볼 때, 부동산에 “죄송하지만 조망은 아예 고려하지 말아주세요”라 주문했다. 이제는 누가 내게 집 사라며 50억을 준다고 해도 한강 보이는 집에는 살지 않을 거다.
왜?
한강 보이는 집에 사는 사람들이 그러더라. 몇 개월 지나면 조망을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그 말 듣고 어쩐지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아름다운 조망이 의미를 잃는 게 싫다.
종일 집에 늘어져 있기도 하나?
스케줄 없는 날이면 거의 집에 머무른다. 집에 있으면서 나의 숨을 느낀다. 하하. 누워 숨 쉬면서 나의 호흡을 느끼고 외로움도 느끼고… 나쁘지 않다. 그럴 때 드는 기분과 감정을 좋아하거든. 혼자 영화 보다 맥주 한잔하고, 고양이들과 이야기 좀 나누고 가끔 책도 읽는다. 그 시간을 즐긴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게 오래된 습관처럼 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친구들과 노는 것도 좋았지만, 놀다가 혼자 집으로 걸어 돌아갈 때 느끼는 기분이 좋더라. 요즘은 혼자 한강에 자주 간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도 어느 밤에 혼자 한강 갔을 때 찍은 거다. 그냥 좀 걸었다. 그런 시간을 워낙 좋아해서.
데뷔 이래 꽤 빠른 속도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작품은 들어오는 대로 하는 편인가?
지금은 거의 들어오는 대로 한다. 내 의지이기도 하고, 회사도 같은 생각이다. 지금은 그냥 달려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빠르다는 생각도 실은 안 해봤다. 나와 연차 비슷한 배우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일 수는 있지만 말이다. 그냥 나와 맞는 속도로 느낀다. 잘할 수 있는 배역에 대해서도 아직은 예민하게 판단하지 않는다.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확립하기엔 이른 것 같다. 경험하면서 만들어나가려고. 아직 어리니까.
새로 시작하는 일에 두려움이 없나 보다.
사실 좀 두렵다. 매번 다른 캐릭터를 새롭게 받아들이고 연기하는 거, 되게 두렵거든. <치즈인더트랩> 시작할 때 너무 무서웠다. 백인호 같은 역할을 이전에 맡아본 적이 없으니까. 백인호는 나와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이었고.
배역이 실제의 자신과 비슷할 땐 자신 있게 달려드나?
그보다는…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왠지 나랑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나. 그 사람과 깊게 이야기해본 것도 아닌데. 나에겐 배역도 마찬가지다. 인물에 대해 직감적으로 느끼고 판단한다. 백인호는 사고방식이 엄청 자유로운 친구였다. 실제 나도 어느 정도 자유로운 편이지만, 인호처럼 외향적이고 분방하지는 않거든. 인호를 알아가면서 이 사람 참 열려 있구나, 생각했다. 그게 나와 많이 다른 점이었다. 인호는 좋아하는 여자도 절대 소유하려 들지 않는다. 좋아하는 마음을 그 자체로 순수하게 둔다. 신기하지. 이런 사람의 눈에는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그 점을 많이 고민하고 상상했다.
<안투라지>에서 맡은 차영빈은 어떤가?
사실 <안투라지>는 다소 편하게 할 수 있는 드라마였다. 쉽다는 게 아니라, 드라마의 성격이 <치즈인더트랩>과는 또 달랐다. <안투라지> 감독님이 현장에서 거듭한 주문이 “리얼하게”였다. 대본에 갇혀 있지 않고 현장에 집중해서 만들어가는 부분이 컸다. 감독님은 우리가 지금 대화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연기를 원하셨다. 현장에서 느끼는 분위기를 실제처럼 받아들이고 교감하는 일이 중요했다.
호흡이 관건이었겠다. 처음 만난 네 배우의 호흡이 잘 들어맞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도 잘 맞았다. 일상적이고, 대화에 큰 감정이 실리는 경우가 거의 없는 드라마다. 감정의 굴곡이 깊거나 크지 않다. 감독님도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 분위기였다면 배우들 간에 애드리브 전쟁이 펼쳐질 법도 하지 않나?
그랬다. 진짜 웃음이 터지고, 농담 따먹고. 그런 순간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나눈 호흡이 꽤 많이 들어 있다. ‘리얼하게’ 하려다 보니 문득 ‘잘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 순간에 그런 생각이 들던가?
굳이 나누자면 내가 맡은 차영빈과 박정민 형이 연기한 이호진이 드라마에서 감정적 라인을 담당한다.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나누는 신을 찍다가도, 내가 여기서 표현해야 할 어떤 감정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스러웠다. 그때마다 (박)정민 형에게 많이 물어보고, 함께 찾아나갔다.
사전 제작 드라마이니, 이제 시청자가 되어 지켜볼 일만 남았네.
사실 감이 안 온다. 그냥 재밌게 촬영했다는 것, 함께 호흡 맞춘 형들과 조진웅 선배님과 끈끈한 마음으로 서로 도와주고 끌어줬다는 것. 그 두 가지는 뿌듯하다. 드라마가 어떨지는 모르겠다. 일단은 기대하고 있다. 다 잊고, 관객이 되어 지켜봐야지.
모델 활동을 하다 연기로 전향한 이야기가 많이 알려져 있다. 모델을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먹고서도 패션쇼에 설 때까지 기다렸다던데.
맞다.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인가? 마음먹은 대로 2개의 쇼에 서고 나서 가차 없이 모델 일을 그만뒀다.
그랬다. 쇼에 서려고, 연습을 정말 많이 했거든. 회사에 연습실이 없어서 좁은 사무실 복도를 걸으며 연습하고. 집이 산본에 있어서 지하철 막차 끊기기 전에 가까스로 집에 갔다 다시 나오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처음부터 모델 일을 오래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모델로 활약하기에는 키도 너무 작았다. 해봤는데 ‘이거다’ 싶지 않아서 그만둘 마음을 먹은 거다. 그래도 쇼 한 번 안 서보고 그만두는 건 못하겠더라.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극적으로 쇼 2개에 캐스팅됐다. 너무 기뻤다. 얼른 잘 마치고 하고 싶은 일 할 생각에. 두 번째 쇼, 그러니까 마지막 쇼에 섰을 때 느꼈던 희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배우로서는 무명 시절이 길지 않았다. 서강준에게도 굉장히 절실한 때가 있었나?
당연하다. 소속사 없이 단역 생활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름다운 그대에게>라는 작품에 출연할 때인데, 한 3개월 정도 주연 배우들과 같이 움직였다. 새벽같이 나와서 새벽 2시쯤 끝나고 또다시 이른 새벽에 나오고. 그런데 방송에는 한 1초 정도 등장한다. 뒤로 배경처럼 깔리기도 하고.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그만둘까?’ 하는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긴, 긴 대기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이 든다. ‘나처럼 단역 하면서 배우 되고 싶어 하는 애들이 지금 대한민국에 수십만 명은 될 텐데. 내가 대체 무슨 경쟁력이 있다고 이러고 있는 걸까. 준수한 외모? 아니, 저 사람도 되게 준수해 보이는데. 어, 저 사람은 엄청 느낌 있게 생겼네. 저 사람은 비현실적으로 잘생겼고… 나 지금 되지도 않을 뜬구름 잡고 있는 것 같네.’
어떻게 버텼나?
절실했으니까.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들, 모든 스태프들이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웠다. 그 안에서 연기하는 배우가 참 멋있어 보였다. 언젠가는 저 속에 꼭 서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도 이게 내 길이라는 확신은 안 든다. 나는 배우로서 그다지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다. 하지만 연기하는 동안 마냥 즐겁고, 나를 보며 즐거워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두 가지만 보고 한다.
현재에 충실한 것에 가깝네.
그렇지. 나에게는 배우로서 타고난 기질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런 내가 하고 있으니, 배우는 누구든 할 수 있는 직업인 것도 같다. 누구든 시작하고 도전할 수 있다. 노력하면 할 수 있다. 아무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배우의 무게란 거기에서 오는 것 같다. 대중에게 얼굴이 알려지고 자신이 어떤 캐릭터가 되어 심판받는 일의 무게라는 건, 상당하다. 이 무게를 견디며 자기 길을 잘 닦아나갈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마음속 깊숙이 들여다봤을 때,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인가가 중요하다.
버틸 만큼 진심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렇다. 인내가 먹히는 곳이다, 여기는.
어쩔 수 없이 배우는 외모가 커리어를 크게 규정짓는다.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직업이니까. 그런데 서강준은 일단 잘생겼잖아. <안투라지>의 ‘다 가진 놈’ 차영빈을 맡을 수 있을 만큼. 기본적으로 타고난 게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외모에 관해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부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준수하다고 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 외모는 외모일 뿐이니까. 물론 신비로운 이미지를 어필해야 할 경우에 흑갈색 눈이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나쁘지 않은 조건을 가진 상태에서 시작한 것은 맞다. 잘 이용해야겠지. 아직까지는 잘 써먹지 못하는 것 같다. 아직은 무척 서툴다. 열심히 하겠다.
어떤 배우는 자신의 외모를 망가뜨리거나 하면서 분위기를 바꾸려 들기도 한다. 리어나르도 디캐프리오는 일부러 살을 찌우기도 했고.
망가뜨리거나 잘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 외모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맡고 싶은 배역이나 나의 한계, 가능성에 관해서도 단순하게 생각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하고 싶은 역할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 아, 하고 싶은 거 하나 있다. 영화 <오아시스> 같은 작품을 한번쯤 만나보고 싶다.
어떤 역할 해보고 싶나? 설경구가 연기한 종두?
아니. 문소리 선배님이 맡은 역할. 몸이 불편하지만, 개의치 않고 완전한 존재로서 사랑을 해내는 것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