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불화가 시작이었던 것 같아. 집 근처에서 서성대다가, 술을 사서 마셨더니 기분이 좋아져서 집에 들어갈 용기가 생기더라. 술이 없었으면 어떻게 이 집에서 살까? 퇴근하면 매일같이 집 근처 벤치에서 술을 마셨어. 주말에는 부모님과 집에 오래 있으니까 더 마셨지.
그러다 독립하니까 좋더라. 돈을 버는 것도 좋더라. 혼자 살면서는 맥주 한 캔정도 가끔 마셨어. 일 열심히 하고 돈도 열심히 모았어. 회사에서 인정도 받았어.
그 후 결혼 출산 육아휴직을 했는데 너무 힘들더라. 그런데다 돈도 안 버니 나는 아무 가치가 없었어. 유아차 밀고 나가면 점심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다 애 본답시고 남편 돈으로 놀고먹는다고 나를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어. 하지만 말 안 통하는 갓난애와 작은 오피스텔에 틀어박혀 새벽 세 시나 낮 열 시에 육아와 병행하며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술밖에 없었어.
어느 날부턴가 차가 쌩쌩 달리는 큰길가에 서면 차도에 뛰어들고싶어서 다리가 움찔했어. 내가 죽어도 남편이 한동안 먹일 수 있게 이유식을 잔뜩 만들어 얼리기도 했어. 길에서 갑자기 엉엉 울기도 했어. 그치만 애가 있는데 적어도 남편 퇴근할 때까진 죽으면 안 되니까 빨리 편의점에 들어가 술을 사서 마셨어. 그랬더니 기분이 좀 좋아져서 죽고싶지 않아지더라. 진짜 저지를 것 같을 때 삘리 취하려고 도수 높은 팩소주를 사왔어. 남편은 요리용 청주인 줄 알았지. 종이팩이라 얼마나 줄어드는지도 안 보여. 머그컵에 부어서 낮에 마시고 육아하면 남편 돌아올 때쯤엔 깨더라.
그 땐 내가 이상한 줄도 몰랐어. 난 원래 술을 좋아하니까. 원래 육아가 힘드니까 다들 죽고싶은데 참고 하는 줄 앟았지. 근데 이상한 줄 몰랐다면서 왜 남편에겐 숨겼지?
그후로 직장에 복직하자 많이 좋아졌어. 남편이 떠나고 아이를 혼자 키우게 됐는데도 일을 하고 돈을 버니까 괜찮았어. 승진도 남들보다 빨랐지. 다들 나에게 자기같으면 도저히 못할 힘든 상황에서 애도 잘 키우고 일도 잘 하다니 대단하다고 했어. 이제 고층창문 앞이나 큰길가에 서도 죽을 생각이 안 나더라.
그렇지만 퇴근하면 나에게 남은 시간을 버틸 수가 없겠는 건 여전헤서 또 술을 마셨지. 힘드니까 그래도 될 것 같았어. 어느 날은 회사 일이 힘들었어서 마셨고 어느 날은 육아가 힘들다고 마셨어. 일주일에 육칠 일은 술을 마시지 않고는 못 견뎠어. 어느 날은 일하다가 술이 너무 먹고싶어져서 점심시간에 혼자 나가 편의점에서 술을 사서 벌컥벌컥 마시고 오후 근무를 하기도 했어.
그렇게 2년쯤 지나서야 내가 우울증이라는 의심이 들더라. 그제야 말이야. 그래서 병원에서 약물치료를 시작하고 점점 호전되자 그제서야 과거의 내가 굉장히 이상했단 생각이 들더라.
어느 날 저녁에 문득 이걸 마신다고 뭐가 달라지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술을 마셔도 나는 계속 버겁고 계속 괴로워. 그 다음 진료에서 의사에게 술마셔도 나에게 남겨진 일을 하는 데에 뭐가 달라지는 건 없는 것 같다고 하니까, 나는 좌절감을 말한 건데 의사가 자기 무릎을 탁 치더라. 술을 마셔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하는 게 근본적인 첫걸음이니까 지금 한 말을 잊지 말래. 그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알겠더라. 나는 의존을 한 것 뿐이고 술에 취하면 내게 주어진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게 잘못된 거였나봐.
그치만 알았다고 해서 바로 술이 끊어지진 않더라. 그래도 조금 태도가 바뀌었어.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아서, 돌아버릴 것 같아서 먹는 건 점점 줄었어. 근데 우습게도, 그래도 별별 핑계를 대면서 결국 마시는 거야. 내가 의존도 아니고 그냥 알콜중독인 게 실감나더라. 이거 하나 제대로 깨닫는 데 도대체 몇 년이 걸린 건지.
그러고서 반 년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술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어. 처음에는 3일 참는 것도 힘들었고 이틀 안 마셨으니 괜찮다고 3일째에 더 많이 마시기도 했어. 그래도 조금씩 빈도와 양을 줄여나가고 있고 무엇보다 이제 힘들다고 술로 피하지는 않아. 갈 길이 먼 것 같은데 그래도 천천히 옳은 방향으로 가리라고 익명으로라도 선언을 해 놔야 앞으로 안 약해지고 잘 할 것 같아서 써봤어. 언젠가 중기가 아니라 진짜 후기를 쓸 수 있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