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readersdigest.co.uk/culture/celebrities/roger-taylor-i-remember
뒤에 이거 어떤 러블리한 달링이 로저 인터뷰 올려준 글
내용은 그렇게 어렵진 않지만 번역해봄.
맘에 드는 짤 찾는게 더 어려웠음... 저장해놓은게 조올라 많아..하...
로저 테일러 "나는 기억한다"
(작성자 대니스캇)
퀸의 드러머 로저테일러는 대니스캇에게 바보같은 옷을 입었고, 프레디와 투어한 것에 대해 얘기함.
<Lonnie Donegan를 발견했다>
당신이 1950년대에 자라지 않는 한, 당시의 음악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건 전부 Doris Day와 BBC Light Orchestra였다.
상당히 재미없고 금욕적인, 영국전쟁 전후의 삶 같았다. 그리고 갑자기, Lonnie Donegan이 나타났다.
나는 그가 TV에서 "Cumberland Gap"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대략 1957년 쯤이었음에 틀림없다. 난 다음날 학교에 가서 한가지 얘기만 했다 “그 사람 봤어? 로니 봤어?”
Lonnie Donegan은 20년 후 펑크처럼 혁명적이었다. 그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다른 세상으로 문을 여는 것과 같았다.
<밴드에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성가대 장학금으로 대성당 학교를 다녔다. 그건 난 좀 노래를 했고, 내 부모님은 내 교육을 위해 돈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Lonnie를 경험한 후에, 나는 진짜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몇몇 그룹에 들어갔고, 음악은 내 인생에 어느정도 자리잡기 시작했다. 우리 부모님은 꽤 엄격했지만, 다행히도 내 음악이 들려 왔을 때, 그들은 매우 너그러웠다.
<런던으로 갔다>
나는 18 살이었고[1967년에], 내가 보조금을 받고 대학에 가기까지 부모님은 걱정스러우셨을거다.
그러나 나의 모든 관심은 밴드를 구성하는것 이었고, 60년대 후반 런던은 환상적이었으며, 음악으로 가득차 있었다-Led Zeppelin, Jimi Hendrix와 같은-
난 런던 병원 의과 대학에 입학하여 치의학을 공부했지만, Imperial College의 바에서 놀곤했다. 어느 날, 브라이언 메이라는 사람을 마주쳤고, 그는 천문학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자기가 기타를 연주한다고 말했고, 그래서 우리는 몇 번 만났다. and 대박, 그는 잘했다. 우리는 즉시 친구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친구다!
<프레디 머큐리와 장사 함>
1969년 즈음에, 나는 런던에서 가장 힙한 장소 중 하나였던 켄싱턴 마켓 (Kensington Market)에서 가게를 열었다. 나는 프레디, 이녀석과 이걸 운영했다. 프레디는 자주 그 당시 브라이언과 내가 하던 ‘스마일’이라는 밴드를 보러왔기 때문에 알게되었다.
나와 프레디는 그가 다양한 뒷거래 중개상에게서 가져 온 에드워디안 스타일의 구제 옷과, 스카프를 팔았다.
그 당시에는 난 그를 가수로서는 잘 몰랐다-그는 그냥 내 친구였다- 내 미친 친구! 재미있는것이 있다면, 프레디와 나는 대게 연루되었다.
우리가 퀸을 결성 한 후에 그는 우리 부모님 집에 내려와 머무르곤 했다. 엄만 그걸 좋아했다. 그는 항상 청결하게 나타났고, 엄만 어떻게 그가 그의 바지를 완벽하게 주름지게 했는지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은, 그는 바지를 벗은 후에, 그걸 완전 빳빳하게 눕혀서 바닥에 있는 그의 매트리스 밑에 넣어두곤했다. 프레디는 자는 동안 그 바지들을 눌러댄거지!
<'보헤미안 랩소디' 녹음>
요즘에는 성공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다. 유튜브에서 히트를 하거나 탤런트 쇼에 나오거나, 짠! 어디에나 있을 수 있지.
퀸에게는 매우 어렵고 오래 걸렸다. 처음에는 공연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열심히 해서, 몇 곡이 히트하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1975년, 우리는 "보헤미안 랩소디"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 개쩌는 비디오! 나는 우리가 이게 우리를 다른 리그로 보내줄거라는걸 꽤 빨리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이상 그냥 좀 괜찮은 락밴드가 아니었다. 우리는 유명해졌다.
<아빠가 되는 것>
나는 내 사생활이 가끔은 헤드라인을 만들었다는걸 인정할 것이다 [로저는 3번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게 내 다섯 자녀와의 훌륭한 관계를 바꾸지는 않았다. 1980년에 처음 아빠가 되었고, 나는 그게 좋았다.
사람들은 ‘당신은 돈이 많기 때문에 부모가 되는 것이 쉽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건 쉽지만, 난 여전히 내 아이들에 대해 걱정을 하고, 여전히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고, 여전히 그들이 열심히 그리고 잘 하길 바란다.
우린 자주 함께 모이고, 그들이 모두 한 방에 있을 때 그건 꽤 무서울 수 있다. 그들은 엄청 시끄러운 사람들이거든.
<라이브에이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우리는 이게 중요한 공연이라는 것을 알았다-처음에는 프레이즈가 "글로벌 주크박스"라고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겨우 그 명단에 더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연주를 흥미롭게 봐줄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사실 좀 걱정했다; 그건 “우리 관객들”이 아니었으니.
다행히도, 우리가 무대에 나가자마자 그들은 미쳐버렸다. 왜냐면 각 공연이 일정한 시간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린 그들에게 죽이는 세트리스트를 줘야한다는걸 알았고,우리는 완전히 대박, 대박, 대박을 쳤다. 그리고 그곳엔 프레디가 있었다. My God, 그는 그 날 완전히 불타올랐다!
(이건 재밌는거)
(이건 패션미스테잌한거ㅋㅋㅋ)
<매우 바보같은 의상을 입는 것>
퀸으로 있는 건 많은 즐거움이 있었지만, 나는 우리가 몇가지 패션상의 실수를 했다는걸 인정할 것이다. 내가 1980년대에 입었던 몇몇 옷들에 대해 후회하냐고? 완전!
모두들 항상 “I Want to Break Free” 뮤직비디오를 보고 얘기한다. [여학생같이 드레스업 한 로저],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건 그냥 우리를 재밌게 해줬다.
내가 정말로 보기 힘든 것은 “It’s a Hard Life”이다. 새털, 골드 라메(금실·은실을 섞어 짠 천), 심지어 블랙 애더(뱀이래ㅋㅋㅋ) 러프(새·동물의 목 주위에 목도리같이 둘러져 있는 깃이나 털). 우린 뭔 생각을 했던거지?
<프레디와 함께 한 우리의 마지막 공연-하지만 그걸 깨닫지 못했다->
우리는 1986년에 'A Kind of Magic' 앨범 투어를 했다. 그리고 확실히 우리는 그게 그의 마지막 쇼가 될거라는걸 몰랐다. [프레디는 다음해 에이즈 진단을 받았다.]
프레디가 이상했던 점은, 그가 최고의 쇼맨일지라도, 그는 본질적으로 샤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얘기했다 “얘들아, 나 더 이상 투어하고 싶지 않아. 이게 즐겁지 않아.”
그러나 우리는 그를 절대 믿지 않았다. 왜냐면 우리는 그의 캐릭터에 스포트라이트를 좋아하는 완전히 다른면이 있다는걸 알았기 때문이다-이 별난 성격은 그를 가능한한 빨리 흥미 끌게 해 관중 앞으로 오게 할수있었다-
20여년 동안, 나는 가장 가까이서, 세계 최고의 프론트맨을 보아왔다.
그가 그립냐고? 당연히, 매일매일이.
-이건 원문으로 읽는게 좋을 듯해서 가져옴. 한글로 직역하니 너무 어색해서 의역했는데 원문이 이거임.
I had the best seat in the house, watching the best frontman in the world.
(퀸이라는) 집의 가장 좋은 자리에서 세계 최고의 프론트맨을 보아왔다ㅠㅠ-
<올림픽 폐막식>
퀸은 큰 공연들을 연주해왔다. 그러나 자국내의 최고의 올림픽 폐막식 세레머니는 매우 어려웠다. 이건 정말 엄청난 영광이었다.
그 쇼의 시청자들은 어떤게 된 일이지? 솔직히 나는 알고싶지 않다.-그건 나를 소름끼치게 할거다-
내가 기억하는 또 다른 사실은 그날 밤 라이브 공연이 많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름도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는 라이브였지, 당연히.
<내 아들 Rufus와 녹음했다>
난 솔로 앨범 ‘Fun on Earth’를 막 발표 했고, 그와 함께 일하는 즐거움을 누렸다.-우리는 “Be With You”라는 곡을 공동작곡했다- 그는 아빠와 같은 드러머이고, 사실 최근 몇몇 퀸 일정에 나와 브라이언과 함께 투어를 돌았다.
음악은 정말로 아이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들이 즐기거나 그렇지 않거나지-그리고 루퍼스는 그걸 즐겼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마 자식이 무언가를 때리기 시작하면 화를 내겠지만, 항상 나는 그가 가구를 존나 후려칠 때 남몰래 겁나 기뻤다. 난 바로 그가 드러머가 될것이라는걸 알았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