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삼성물산·금융지주 ‘통큰 소각’ 확산
중견·중소는 자사주 EB 발행 급증… 주식가치 희석
[헤럴드경제=홍석희 기자]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담은 3차 상법 개정안 처리가 임박하면서 상장사들의 자사주 전략이 뚜렷하게 갈리고 있다. 풍부한 현금흐름을 확보한 대기업들은 대규모 자사주 소각으로 주주환원을 강화하는 반면, 중견·중소기업들은 자사주를 교환 대상으로 한 교환사채(EB) 발행을 늘리며 자사주 처분에 나서고 있다. 자사주 소각과 자사주 처분은 주주 입장에선 큰 차이다. 소각은 주식 가치를 상승시키지만, 처분은 주식 가치를 하락시키는 요인이다.
▶대기업 ‘소각 랠리’… 역대 최대 규모 주주환원=7일 재계 등에 따르면 지난해 유가증권시장 자사주 소각 규모는 약 23조원을 넘어서며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 두 배 이상 증가한 수치로, 정부의 밸류업 정책과 상법 개정 논의가 맞물린 결과로 평가된다. 이 같은 흐름은 올해 들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달 1530만주 규모 자사주 소각을 결정했다. 이는 10조원이 넘는 대규모 물량으로, 단일 기업 기준으로도 이례적인 수준이다. 소각 예정일은 2월 9일이다. 시장에서는 강력한 현금창출력을 기반으로 한 ‘정책형 주주환원’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삼성물산 역시 약 2조원대 규모 자사주 소각을 결정하며 주주환원 정책 강화에 동참했다. KB금융그룹도 지난달 15일 자사주 861만주를 소각했다. 약 1조2000억원 수준이며, 발행주식총수의 2.3%에 이른다. 하나금융지주도 올해 상반기 4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과 소각 계획을 발표했다. 현대차도 보통주 74만4870주(3668억원)와 기타주식 12만5054주(338억원)를 취득한다고 공시했고 자기주식 1%는 소각키로 했다. 미래에셋증권도 지난달 26일 1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발표하고 단계적인 자사주 소각을 진행할 예정이다.
대기업 전반에서 확인되는 공통점은 큰 이익을 본 기업들이 자사주를 소각해 주당가치를 상승시키고 이익 증가분 만큼을 주주들에게 배분하는 구조라는 점이다. 자사주 소각으로 주식 수 자체를 줄여 주당이익(EPS)과 주당가치 상승을 유도하는 셈이다. 이는 정부의 주식시장 부양 정책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증권가에서는 자사주 소각이 단순 이벤트를 넘어 구조적 주주환원 정책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소각 의무화가 현실화될 경우 이러한 흐름은 더욱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중견·중소는 ‘EB 유동화’… ‘자사주 처분’ 러시=반면 중견·중소 상장사들의 움직임은 정반대다. 올해 들어 교환사채(EB) 등 자사주 처분에 나선 중견기업들은 티에프이, 오킨스전자, 한국토지신탁, 범한퓨얼셀, 제노레이, 아주스틸, 뉴파워프라즈마, 크레버스, 알서포트, 클리오 줄잡아 10여 곳에 이른다. 이들 대부분은 자기주식을 기반으로 EB를 발행했다. 대부분 시가총액 5조원 미만 기업들이다.
EB는 신주 발행 없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회사채의 일종이다. 자사주를 기반으로 채권을 발행하는 것이기에 최초 발행 당시엔 지분 희석이 없는 구조처럼 보인다. 그러나 투자자가 특정 시점에 교환권을 행사하게 될 경우 보유 자사주가 시장에 풀리게 된다. 이는 유통주식 수 증가로 인해 기존 주주의 지분가치 희석 가능성을 키운다. ‘자사주 소각’이 주당가치를 끌어올리는 반면, ‘자사주 EB 발행’은 잠재적 매도 물량(오버행)을 키우는 구조다.
특히 티에프이, 오킨스전자, 알서포트 등은 ‘표면금리·만기이자 0%’ 조건을 적용해 사실상 무이자 자금조달을 공시했다. 이는 EB 투자자 입장에선 불리한 협정 조건이다. 이 때문에 ‘금리 0%’ EB 발행은 결국 추후 ‘주식 교환’ 가능성을 키우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금리 0% 사채는 발행 회사 입장에선 당장 금리 부담을 줄이는 방법이지만, EB 투자자 입장에선 ‘주식으로 교환 받아 금리 손해를 메우겠다’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커지게 되기 때문이다.
중견기업들의 자사주 EB 발행 러시는 ‘3차 상법 개정 논의’와 무관치 않다. 국회에서는 현재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포함한 3차 상법 개정안 논의가 진행 중이고, 오는 13일에는 공청회를 거쳐 이르면 이달 중 처리 가능성이 거론된다.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자사주 활용 방식에 제약이 커질 수 있는 만큼, 기업들이 제도 변화 이전에 자사주 규모를 줄이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한편 대법원과 법무부는 최근 국회가 ‘자사주 의무 소각’ 내용을 담은 ‘3차 상법 개정안’에 대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기존 자사주 소각 유예 기간을 2년으로 둬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파악됐다. 경영권 방어 수단 도입 필요성도 법무부 보고서에 포함돼 법사위에 제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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