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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3v3r_달의 심장.txt

무명의 더쿠 | 00:33 | 조회 수 887

*이 글은 웹툰 <달의 심장>의 내용을 바탕으로 구현 및 각색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샛노란 여름이 작열하는 계절이었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살은 뒷목을 찌릿하게 달굴 만큼 뜨거웠지만,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숨결을 내뱉었다. 노아는 강가에서 날갯짓을 시작하는 새들을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멀리서는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벌써 여름인가…. 답답하군. 하늘을 날면 이 마음이 좀 트이려나.’


노아는 자신이 어떤 상념에 잠겨 있는지도 모른 채, 강물의 흐름 속에 의식을 침잠시켰다. 들려오는 소음들을 감각으로만 인지할 뿐, 그것을 의미로 치환하지 못한 채 무심히 흘려보냈다. 체감되지 않는 시간은 노아를 자꾸만 먼 곳, 아주 먼 곳으로 실어 날랐다. 지금의 삶에 온전히 발을 붙이고 있으면서도, 이따금 출처를 알 수 없는 지독한 상실감이 그를 덮쳐오곤 했다.

“대장!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무심코 어깨에 올라온 손에 노아가 상념을 깨고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들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노아를 향한 깊은 신뢰와 경외심이 서려 있었다.

“아, 미안하다. 날이 좋아 잠시 딴생각을 했군.” 

“진짜 왜 이러신담. 날이 더워서 더위라도 드신 거예요? 이제 곧 출항입니다. 빨리 이동해야 해요.”

부대장의 넉살 좋은 타박에 노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블 비질란테(Noble Vigilante)’. 그것은 노아가 이 여름 나라의 문제를 바로잡고자 세운 의적단이었다. 눈앞에서 험악하게 웃고 있는 저 사내들은 모두 노아가 아니었으면 진작 뒷골목에서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거나 지옥에 떨어졌을 자들이었다. 노아가 거둬들여 살린 목숨이 어디 저들뿐이랴. 이 나라 전체를 통틀어 노아에게 목숨을 빚진 자들만 반절은 족히 넘을 터였다.

그들은 스스로의 배를 불리기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주었고, 불의를 보면 결코 지나치지 못했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랬다. 국고로 환수되어 자신들에게는 단 한 푼의 이득도 떨어지지 않을 밀수품을 되찾기 위해,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웃 나라까지 넘어와 밀수업자들을 추적하는 중이지 않은가.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두고 여름 나라의 황제조차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한 자경단, '노블 비질란테'라 부르며 칭송했다.

노아는 자신이 짊어진 대장의 무게와 이 사내들과 함께해 온 치열한 시간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이따금씩 찾아오는 침잠이 그가 무언가를 잃어버렸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짙은 안개에 휩싸인 듯 텅 비어있는 기억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가늠치 못하게 했다.

“이제 진짜 촉박합니다. 그만 가시죠, 대장.”

부대장의 재촉에 노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시장에 도착하자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 목적 없이 떠도는 이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조차 소음 속에 파묻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때였다. 무언가 묵직하고 가녀린 힘이 노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도와주세요… 제발…!”

바닥을 기어온 여자의 손은 엉망으로 터져 있었고, 맨발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도망친 노예임을 짐작할 수 있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왜 이래! 이 분이 누구인줄은 알고 손대는 거야!”

노아가 움직이기 전 그의 부하들이 먼저 나섰다. 그들은 억센 손길로 여자를 떨어 트려 넣고자 했다.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다. 무심결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노아와 눈을 마주했다. 순간, 노아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눈동자. 온통 하얀 눈으로 차갑기만 했던 잃어버린 기억 속 어딘가를, 유일하게 따뜻하게 만들어주던 빛나는 눈동자가 눈앞에 있었다.

“....제이드린?”

이름을 부른 것은 뇌가 아니라 심장이었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던, 기억하지 못하는 자아조차 본능적으로 반응할 만큼 영혼 깊이 새겨진 이름. 그 목소리에 여자의 커다란 눈에서 맑은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노아는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의 의미도, 여자의 눈물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슴 한 켠을 툭하고 지나가는 묵직한 감정이 그동안 노아를 지겹도록 괴롭히던 상실의 의미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함부로 눈을 뗄 수 없었다. 꼭 세상이 지금 이 순간- 영원에 갇혀버린 느낌이었다.

태양은 잔인할 정도로 눈부셨고, 그들의 찬란한 그림자는 아스라이 시간 속으로 흩어져갔다.

.
.
.

며칠 전.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었다. 제이드린 가문의 성은 언제나 고요한 설국 속에 고립되어 있었다. 몰락한 성기사 가문의 영애인 여덟 살 제이드린에게 세상은 창문 너머의 하얀 풍경이 전부였고,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수호자는 아버지의 배려로 곁에 두게 된 청년, 노아였다.

“노아,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줄 거야?”

아이의 맑은 목소리에 노아는 묵묵히 손을 뻗어 그림자를 조종했다. 성벽 위에 비친 노아의 짙은 그림자가 거대한 새가 되었다가, 달리는 강아지가 되기도 했다. 아이는 그 아름다운 그림자 인형극을 보며 해맑게 웃었다. 노아에게 있어 자신의 그림자가 누군가를 웃게 할 수 있단 사실은, 이 슬픈 생애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축복이었다.

“노아, 저기 봐! 오늘은 눈송이가 평소보다 더 커!”

제이드린이 작은 손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아이의 가슴팍에는 붉은색 브로치, ‘달의 심장’이 차가운 햇살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노아는 그 유물이 지닌 가공할 위력을 알지 못했다. 그저 제이드린의 어머니가 남긴 소중한 유품이며, 아이가 불안할 때마다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는 안식처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노아는 한 번도 자신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이 자신을 일식의 낙인이 찍혔다 손가락질 해도, 노아는 단연코 위축된 적이 없었다. 노아가 밝게 자라올 수 있었던 건 다 아버지 덕분이었다.

‘너는 그저 마법사와 평민이 서로 많이 사랑했다는 결실이란다. 사람들이 널 빛을 먹어치우는 저주에 걸렸다고 손가락질 해도 아파하지 말렴. 다 틀린 말이야. 빛 아래에서도 네 그림자가 흐려지지 않는 건, 되려 세상에 네 존재가 확실해서란다. 그만큼 넌 존재할 이유가 확실하고, 존재만으로도 우리에게 선물같은 사람이란 거지.’

아버지는 늘 그렇게 노아의 존재를 긍정해주었다. 하지만 그 따스한 가르침을 주던 아버지는 이제 곁에 없었다.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유지는 제이드린의 가문으로 들어가 그녀의 그림자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노아는 그것이 단순한 고용 관계 이상의, 운명적인 결속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평화는 유난히 고요한 법이다. 성안의 사람들은 다가올 폭풍을 예감하지 못한 채 각자의 일상에 충실했다. 제이드린은 여느 날처럼 노아의 손을 이끌며 눈놀이를 나가자고 떼를 썼고, 노아는 따뜻하게 입기 전까지는 나가지 못한다며 제이드린과 실랑이를 벌였다. 성안의 사용인들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남매 같다며 웃곤 했다. 정말 평화로운 날이었다. 어떠한 불행도 감히 예측하지 못할 만큼.

그러나 그날 밤, 성의 외곽에서부터 기이한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겨울 세계의 여왕 아리안드라가 보낸 기사단이 눈보라를 뚫고 성문 앞까지 당도한 것이었다. 

“노아! 무서워,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잠결에 깨어난 제이드린이 노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노아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횃불의 붉은 빛이 설원을 피처럼 물들이고 있었다. 노아는 직감했다. 아버지가 말했던 '존재할 이유'가 어쩌면 오늘,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괜찮습니다, 아가씨. 제가 곁에 있으니까요. 꼭 지켜드릴게요.”

노아는 제이드린을 품에 안았다. 아이의 심장 소리가 브로치를 타고 노아의 가슴까지 전해졌다. 그것은 제이드린 가문의 비극이 시작됨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이 열리기 직전의 마지막 고동이었다.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방문에 성문은 흉포한 괴성을 울리며 안쪽으로 꺾여 들어왔다. 단단한 철제 경첩이 비틀리는 소음은 정적에 잠겨있던 성 안을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여왕 아리안드라의 기사단은 차가운 눈보라를 등에 업고 검은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노아는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제이드린을 더욱 세게 품에 안았다. 복도 끝에서부터 들려오는 금속제 갑옷의 마찰 소리와 거친 명령조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가문의 성을 지키던 병사들의 비명이 짧게 끊어질 때마다 노아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

“노아, 나 너무 무서워….”

“눈을 감으세요, 아가씨. 곧 끝날 겁니다.”

노아는 제이드린을 이끌러 서둘러 서고 안쪽의 비밀 통로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여왕의 기사단은 마치 성 안을 빤히 꿰뚫고 있는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들의 뒤를 쫓았다.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비밀 통로의 문이 박살 나며 기사단장과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저들을 끌어 내라.”

“이거 놔!”

노아와 제이드린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그들에게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그들의 아귀힘은 노아와 제이드린의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노아는 마법을 사용하고 싶었으나, 그들의 손에 제이드린이 잡혀있는 것을 보고 금세 포기했다. 제이드린을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노아의 힘은 아직 정교하지 못했다.

“제이드린, 순순히 내놓아라. 그것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서고 한가운데 내팽겨쳐진 그들 앞에 까만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리안드라 여왕이 욕망에 가득 찬 눈으로 그들을 내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기사단장의 서늘한 검 끝이 노아와 제이드린 그 어딘가의 목을 겨눴다. 노아는 제이드린을 등 뒤로 숨기며 자신의 발밑을 바라보았다. 정오의 빛도 아닌 희미한 횃불 아래서, 그의 그림자는 기이할 정도로 짙고 선명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아가씨를… 유물을 건들 생각 하지마.”

“우리의 목표가 과연 제이드린 하나일까?”

뭐…? 노아의 고개가 한껏 치켜올려졌다. 당황에 물든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런 노아를 응시하던 아리안드라 여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우린 단순히 저 자의 가문에서 빼돌린 내 ‘달의 심장’을 돌려받겠다 온 것이 아냐. 이 세상을 구하겠다는 숭고한 목적을 갖고 온 거지.”

“...웃기는 소리.”

“제이드린은 몰라도 너는 느끼고 있지 않나, 혼혈? 이 세계가 요즘 들어 부쩍 불안정해졌다는 사실을. 나는 이 세계를 구할 거야. 다시 왕가의 권력을 되찾고 말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달의 심장’을 담을 그릇과 점화원이 필요하지.”

“그릇과… 점화원….?”

“그래. 제이드린과 너 말이다. 이클립스만이 달의 심장의 통로가 될 수 있다지? 그러니 너도 우리에게 협조해줘야겠어.”

“달의 심장을 쓸 줄은 알고?”

“방법을 모르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악!”

작은 비명과 함께 제이드린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여왕이 던진 단검이 제이드린의 목가에 박혀있었다. 아이의 하얀 잠옷 위로 붉은 꽃이 피어나듯 선혈이 번져나갔다. 그 순간, 제이드린의 가슴에 달린 달의 심장이 격렬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브로치는 더이상 아름다운 장신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이며 기괴한 진동을 울렸다.

“아가씨! 제이드린!”

노아는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안아 들었다. 제이드린의 호흡은 거칠고 위태로웠다. 망가진 그릇에서 흘러나온 피가 노아의 짙은 그림자와 맞닿는 순간, 노아는 직감했다. 지금 이 유물을 작동시키지 않으면 제이드린은 이곳에서 싸늘한 주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어떤 대가를 맞이하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도 좋다. 그러니 제발 이 아이만은… 지금처럼 순수하게 웃을 수 있는 곳으로 보내 다오!”

노아가 브로치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자, 숨어있던 반달 모양이 튀어나왔다.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온 순금색 광휘가 두 사람을 감싸고 돌았다. 절규와 함께 노아가 그림자를 유물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내 눈부색 금색 빛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기사단장이 손을 뻗었지만, 그가 움켜쥔 것은 허공을 가르는 차가운 눈송이뿐이었다.

광활한 빛의 폭발과 함께 두 사람의 모습은 겨울 세계에서 완전히 소멸했다. 남겨진 것은 무너진 성벽과 주인을 잃은 핏자국, 그리고 소리 없이 내리는 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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