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중예산 영화들의 다채로운 활약
텐트폴 또는 블록버스터의 시대가 저물고 중예산 영화 전성기가 오는 걸까. 10년 넘게 한국영화 산업을 지배했던 흥행 방식이 급변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수백억 원을 쏟아부은 영화들이 흥행 전선에서 패퇴를 거듭하고 있는 반면 ‘똘똘한’ 중예산 영화들이 약진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영화 흥행 순위는 중예산 영화의 강세를 실감 나게 한다. 톱 10편 중 6편이 중예산 영화다. 관객 564만 명을 모으며 흥행 1위에 오른 <좀비딸>은 텐트폴이 아니다. 순제작비 110억 원이 들어간 중예산 영화다. 덩치는 크지 않으나 제작비의 5배가 넘는 극장 매출 531억 원을 만들어냈다.
지난해 12월 31일 개봉해 260만 명(매출 255억 원)이 본 <만약에 우리> 역시 중예산 영화로, 순제작비가 30억 원이다. 그에 앞선 지난해 12월 24일 극장가에 선보인 <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순제작비 36억 원으로 86만 명(매출 83억 원)을 모았다. 흥행 수치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아도 알짜 장사를 한 셈이다. 두 영화는 한국 청춘멜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며, 연말연초 극장가에서 한국영화의 존재감을 새삼 드러냈다. 그리고 올해 2월 4일 <왕과 사는 남자>가 개봉한 이후 극장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왕과 사는 남자>의 순제작비는 105억 원이다. 사극은 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보다 으레 제작비가 1.5배 이상 많이 들어가는 영역이다. <왕과 사는 남자>는 사극으로 국한하면 중저예산이라 할 수 있다.
<왕과 사는 남자>는 지난 3월 6일 관객 1천만 명 고지에 오르며 오랜만에 극장가에 함박웃음을 안겼다. <파묘>(2024) 이후 2년 만에 나온 천만 영화다. 순제작비보다 10배 이상의 극장 매출(3월 12일 기준 1천206만 명, 매출 1천162억 원)을 올렸으니 영화인들의 눈길이 더 쏠릴 수밖에 없다. 한 주 차이로 2월 11일 개봉해 설날 연휴 시장을 정조준했던 대작 <휴민트>(순제작비 235억 원)의 부진(3월 12일 기준 관객 195만 명, 매출 197억 원)은 관객 유입이 계속되고 있는 <왕과 사는 남자>의 수익률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대작 불패 신화’는 무너졌다. 2022년 여름 개봉한 <비상선언>과 <외계+인> 1부, 2023년 여름 선보인 <비공식작전>과 <더 문> <1947 보스톤>이 실망스러운 흥행 기록을 남겼다. 2024년에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2025년에는 <전지적 독자 시점>이 대작 영화 잔혹사를 이어갔다. <서울의 봄>(2023, 1천313만 명)이 특별한 예외로 보일 정도로 대작 흥행 부진이 잇달았다.
코로나19 이후 극장 전체 관객 수가 줄어든 상황에서 흥행 성적까지 좋지 않으니 블록버스터 제작에 대한 경계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수익은 크지 않을지라도 안정성 있는 중예산 영화에 눈길이 더 가기 마련이다. 돈을 크게 들여 위험을 감수하고 큰 수익을 노리기보다 돈을 적게 쓰고 안정적인 소액 수익을 노리는 경향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한 대형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예산 규모가 커지면 위험도가 커지는데, 성공 가능성 자체가 예전보다 어렵다고 평가되는 부분이 있다”면서 “대작 영화라고 무조건 기피되는 상황은 아니나 큰 예산일 경우 확실히 고민이 (예전보다) 더 되는 점이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위험도가 있더라도 어느 정도는 (영화계) 전체 수익률이 안정적이라는 판단이 들어야 투자자들 접근성이 좋아지고, 제작사들도 다양한 시도를 해 볼 수 있는 지점이 확실히 있을 것 같다”며 “중예산 영화들이 재무적인 접근 차원에서는 안정성이 있는 셈이고, 일정 투자금으로 다양한 영화에 투자하니 위험도를 피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천만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중예산 붐 일으킬까올해 개봉하는 중예산 영화가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 바통을 이어받으면 중예산 영화 제작이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호프>(순제작비 550억 원 추정)와 <군체>(순제작비 170억 원 추정), <국제시장2>(순제작비 170억 원 추정)를 제외하면 올해 선보일 한국 상업영화들은 대부분 중예산 영화로 보면 된다. <살목지> <폭설> <정가네 목장> <와일드 씽> <경주기행> 등이 중예산 영화의 반란을 꾀하고 있다.
극장 전체 관객 수가 팬데믹 이전인 2019년(2억 2천688만 명)보다 절반으로 줄어든 1억 명 규모의 상황에서 중예산 영화 제작은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시장 크기가 작아진 현실에 맞춰 제작비를 줄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한 중견 영화사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제작비를 줄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도저히 없다. 신진 배우를 캐스팅하든 촬영 기간을 줄이든 제작비 절감 방식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어쩌면 한국 영화인들은 중예산 영화 제작이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를 맞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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