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들의 쾌락과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결혼이라는 계약을 했다고 생각해
다만 반야는 귀찮은 소동까지 감수하면서
계약을 유지하고 싶을만큼 아노라에게
진심이 아니었고,
아노라는 남자를 이용해
신분상승을 하더라도
편하고 안락한 환경을 꾀한
속물적인 면을 보여준 한편,
스물셋이라는 나이답게
백마 탄 왕자님과의 사랑이
가능하리라 꿈꿨던 어수룩함이
안쓰럽게 느껴졌어
반야와의 소통은 오로지
섹스로만 일관했던 아노라가
반야의 가문 수하인 세얼간이들과
소동 끝에 반야를 찾아냈을때
자신들의 사랑의 위기를
그저 신분차에서 오는 환경으로만 치부하며
반야를 아이 달래는 엄마처럼
간절하게 설득하는 아노라의 순진함이
계속 잔상으로 남더라
사실 이 작품은
아노라와 반야, 반야의 엄마 모두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고
계속 묘사되고 있잖아?
아노라는 처음 맛본 부자들의 세계를
선망해서 반야의 제안을 덥썩 물고,
반야는 고작 하룻밤으로 끝날 단순한 변덕으로
책임감 없이 아노라를 끌어들이고,
반야의 엄마는 아노라를 아노라로 보지 않고
매춘부로 정의내리고는 대화할 기회마저
차단해 버리지
다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봐주기보다는
본인들의 욕구와 욕망을
상대방에게 투영해서 혹은
상대방을 이용해서 충족하려고 하잖아
나는 이 영화가
직업이나 산업의 부조리함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로 만들어진게 아닌 것같아
직업을 제하면 아노라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흔히 보일 법한 평범한 모습들이지
이 영화에서는
그저 직업이 매춘부로 묘사되었을 뿐인
남녀간의 로맨스를 다뤘기 때문일까?
아노라가 그저 가난한 사람으로 나왔더라면
이 신분에서 오는 격차라는 딜레마를
충분히 표현하기 힘들었을 것같아
아노라는 반야로부터 정면으로
관계를 부정당하고 나서야
자존심을 챙기지만,
자존심은 아노라라는 사람의 본질과
동일시 될 수는 없잖아
아이러니하게도 아노라를 아노라로
봐준 건 이 주요등장인물에서 제일 밑에 있는
이고르뿐이었다는게 참 좋더라
아노라 본인의 욕망이 전면적으로 좌절됨과 동시에,
아노라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줄 사람을
만났다는 설정이 꽤나 낭만적으로 다가왔음
자신을 연민으로, 사람대사람의 애정으로
봐주는 이고르의 진심에 아노라는
그녀에게 익숙한 소통방식으로 대응하려다가,
결국 이건 아니라는듯
혼란스러워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마지막 장면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것같아
아노라는 반야-이고르와의 만남으로
'사람'을 알게 됐다고 생각되는 결말이었어
고통이 고통으로만 끝나지 않아서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