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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아노라) 나는 아노라를 (스포일러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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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0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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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귀여운 여인'을 다시 만든 버전이라는게 
명백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보았음 

 

수십년간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으로 군림한
그 영화가 나는 예전에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건 이 내용이 사랑을 앞세운

순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야기 내내 주인공 두 사람의 상하관계 및 
권력관계가 너무나 명백하다는 걸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임  

 

신데렐라 스토리야 대중문학에서 너무나 흔하다지만
가게 점원이나 말단 직원과 재벌 2세가 연애하는 것과 
성노동자(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단은 이 표현으로 
통일)와 돈 많은 기업가가 연애하는 모양새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심지어 

 

성을 제공하고 일주간의 계약 만남을 가지는 것이라면
더욱

 

그래서 나는 '귀여운 여인'이라는 영화 자체가 
번드르르한 모습을 한 무언가가 눈앞에서 
거대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현장이라고 생각했음 

 

이건 
단순히 몸을 파는 여자는 그런 멋진 남자에게 
구원받을 수 없다거나 
너같은 인간은 부자들의 세계보다는 
시궁창이 어울려.. 하고 얕잡아 보는 
그런 마음과는 좀 다른데 

 

두꺼운 장막에 가려진 듯한 

이 복잡한 심경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땐 알 수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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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라'의 도입부 설정은 수상할 정도로 
'귀여운 여인'과 닮았음

 

업소에서 일하는 성노동자인 애니는 
러시아어를 어느정도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러시아에서 온 젊은 부자인 '반야'를 상대하게 되는데 


이내 애니에게 호감을 가진 반야는 
일주일간의 계약 연애를 제의하고 이 만남은
결국 꿈같은 청혼으로 이어짐 

 

이 도입부가 꽤 길어서 40분이 넘어가는 것 같지만  
대강 '귀여운 여인'을 다른 모양새로 압축한 
철없고 적나라한 버전이라 생각하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님

 

이 대목에서 중요한 건 작중에 잠깐 나오는 
'출퇴근'을 하며 집에서 쉬고 있는 애니의 모습임
 
요란한 치장을 하고 춤을 추며 조명 아래에서 
웃고 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얼굴  
그 맥없고 지친 듯한 목소리 

 

낯선 맥락처럼 보이는 이 장면이 왜 나왔는지를 
나는 1막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음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 
중반부 이후부터 '아노라'는 
마치 다른 영화처럼 변하게 됨 

 

정신없는 파티와 부유층의 향락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초반 '아노라'의 일부는  
마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같은
화려한 헐리우드 에로 영화를 닮았음  

 

자극적인 장면들과 비현실적인 연애가 이어지는
이 구간은 시간의 흐름도 꽤 빠른 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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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막부터는 작중 시간이 마치

실제 시간처럼 흘러감 
특히 중반부의 시작을 알리는 거실의 
극한 대치 장면은 거의 실시간이나 다름 없는데 

이 부분에서 마치 감독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음


이제부터가 내가 진실로 말하고 싶은 것이고 
지금부터 당신이 마주하는게 애니의 실제 얼굴이다 

 

말도 안되게 천천히 흐르는 중반부의 전개 속에서 
이런저런 행동을 하는 애니를 
한참동안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음 

 

그러고 보니까 한 시간 가까이 이 주인공을 봤는데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 

 

그 속의 애니의 표정과 행동들은 
초반부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음 

 

이반을 만날 때, 그리고 일터에서의 애니는 

감독의 편집과 연출,그리고 애니의

직업적인 특성 속에서 한껏 가공되어 있었음

 

하지만 실시간으로 흐르는 그 장면에서는 

누군가가 개입하는 게 불가능했음 


그리고 왠지 그 얼굴이 처음에 잠깐 스쳐지나갔던 
출퇴근을 하며 쉬고 있는 애니와 겹쳐 보였음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애니를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남자주인공인 이고르의 시선임 

 

그는 처음부터 애니의 일할 때의 모습 
화려한 치장에 둘러싸인 접대용 미소를 보지 못했음
그러므로 그에게는 아무런 편견이 개입될 수 없음

 

이것이 이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점임

 

애니가 일주일이 넘는 기간동안 이반에게 보여줬던 
그 얼굴은 그녀에게 업무의 연장선이었음 

자연스레 그런 물음을 가질 수밖에 없음

 

결혼에 성공해서 신분 상승을 했다면 애니는 
일터에서의 그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을 것임 

 

물론 이것도 좋은 일이고 일생 일대의 성공이겠지만 
그러면 그 아래에 잠들어 있을 그 사람의 
원래 얼굴은 어떻게 되는 걸까 

 

상처뿐인 짧은 결혼을 마치고 잠시 집으로 돌아와 
본명에 얽힌 유래를 말하며 멋쩍어하는 애니에게 
이고르는 그렇게 말해줌 

 

나는 니 진짜 이름인 '아노라'가 좋다고. 

이건 오랜 기간을 애니로 살아온 그녀로서는 
절대 쉽게 들을 수 없었을 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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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꽤 오랜 시간 '귀여운 여인'을 
이상하고 균형이 맞지 않으며 
부자연스러운 이야기라고 생각해 왔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 뿐만이 아니라는 걸
이 영화를 다룬 넷플릭스의 다큐를 보며 알았음 

 

다큐의 말미에서 '귀여운 여인'의 시나리오를 집필한
작가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원래 어떤 결말이었는지를 설명해 주었는데 

 

애당초 '귀여운 여인'은 일주일의 계약 연애를 끝내고
처음 만난 곳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인공 두 사람이 
크게 싸운 후 헤어지는 내용이었다고 함 

 

돈을 매몰차게 뿌린 후 에드워드가 떠나가고 
흩날리는 지폐 다발을 주섬주섬 주워담은 비비안은 
그 돈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이전에 계획했던 대로 
친구와 함께 디즈니랜드를 가게 됨

 

버스 안에서 친구는 비비안에게 그렇게 말함  
"귀가 달린 풍선도 살 수 있을까?
그런건 역시 애들이나 사는 건가?" 

 

그 물음에 비비안은 이렇게 대답해 줌 
"아니야, 귀가 달린 풍선은 지금도 살 수 있어."

 

눈물이 날 것 같은 그 결말이 왜 싫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또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나 
'아노라'가 알려 주었음 

 

이게 주인공을 존중하는 방식이라거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옳다거나 
그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음 


과연 그렇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드는 

영화였는지도 모르겠고 

 

다만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날 
애니의 집 앞에서 계단을 오르던 그녀가 
다시 차로 돌아와 
이고르의 몸 위에 걸터앉았을 때 흘렸던 눈물 
절절하게 전해지던 속상하고 미어지는 감정 
그 위로 흐르던 와이퍼가 삐걱거리던 소리와 
정적의 엔딩 크레딧 

 

그 혼란스런 모습만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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