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패디는 혐오스럽지만, 매력적이다.(물론 뒤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유쾌한데 상스럽고, 더러운데 섹시하고, 교양은 있지만 야만적이다.(글로 쓰면 작위적인 느낌 낭낭한데 제임스 맥어보이가 잘해도 너무 잘했다) 키아라가 만든 토기(?)와 패디가 지하실에 기념품을 진열해둔 모습을 비교해 보면 인테리어는 패디 솜씨인 듯하다. 패디가 진짜 의사일까 의심했는데(동물용 마취제를 쓰길래 수의사인가 싶기도 했는데) 배우 인터뷰 보니까 의사 맞더라. 설마 국경없는의사회 활동도 진짜인가...... 패디는 다면적인 인물이고, '어쩌면 그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남긴 채 죽었다. 그게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역겹게 한다. 선악을 또렷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건 역겨운 일이다.
3. 패디네 가족이 루이스 가족에 비해 입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그려지긴 했지만, 루이스 가족도 좋았다. 나는 루이스 가족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토끼인형이 없으면 공황장애를 일으키는 12살 아이다. 아빠는 꾸준히 유약하고 선한 사람이다. 그들의 선택과 반응이 충분히 이해됐고, 그래서 쫄리긴 했어도 그들이 답답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가족이 차근차근 성장하는 모습이 훈훈했다. 루이스 가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것 같다.(오히려 루이스가 지나치게 완벽한 캐릭터로 묘사되는 것과 아그네스가 생리를 겪은 적도 없는데 스스로 생리를 흉내내는 게 개연성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4. 키아라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어떤 얘기를 듣게 될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키아라가 왜 패디를 안 쏘냐고 화내지 말았으면ㅠㅠ
5. 엔트. 영화는 엔트로 시작해서 엔트로 끝난다. 이 영화는 어쩌면 엔트의 이야기다. 엔트가 선택해야 했을 때, 나는 한편으로는 엔트가 그러길 바랐고, 한편으론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그랬어도, 그러지 않았어도 만족스럽지 않았을 거다. 엔트는 애초에 만족할 만한 선택할 할 수가 없었다. 그걸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엔트가 그랬을 때, 나는 이해하면서도 두려웠다. 엔트가 눈물을 흘렸을 때, 나는 잠깐 안심했다가, 패디가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장면을 떠올려 버렸다. 감독은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 영화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엔트가 다음 편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를. 부디 평범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아가기를.
6. 루이스 가족이 패디네를 찾아가는 길에 남근이 돋보이는 언덕그림을 보게 된다. 실제 있는 유적일 거 같아서 찾아봤더니 영국 도싯주 케른 아바스 마을 인근 언덕에 위치한 실존하는 유적이 맞았다. 나는 데번이라고 들은 거 같은데 이 유적을 보면 배경은 도싯이 맞을 것 같다. 루드맨 또는 케른 아바스의 거인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패디에 대한 비유겠지.
7. 후반부 액션이 소소하다. 뭐 블룸하우스니까 이 정도면 만족한다. 쓸데없이 잔인하지 않은 것도 좋았다. 나는 쫄보니까.
8. 개인적으론 후반부보다 전반부가 더 매력적이었다. 헷갈리게 만드는 패디의 말발과 패디와 루이스의 신경전이 좋았다. 특히 채식주의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가 흥미로웠는데 좀더 깊게 들어갔으면 패디가 기득권 또는 도시 사람들에 대해 갖고 있는 분노와 혐오의 이유가 더 잘 드러났을거 같은데 뭐 노잼이겠지
9. 농가 내 공터 쓸데없이 넓다고 생각했는데 왜 넓어야 하는지 지금 깨달았다. 아.......